<나 하나만 참으면 괜찮을 줄 알았어> 에피소드 06
<왜 나는 쇠똥구리도 아닌데 자꾸 똥을 만나는가>
사실 이건 좀 진부한 얘기다. 어느 회사에나 한 명쯤 있을 법한, ‘사내 정치에 미친’ 한 나쁜 년에 대한 이야기니까. 그래서 이 이야기를 쓰기 전에 한참을 고민했다. “네, 이년!” 하고 욕만 하다 끝나기엔 ‘그래서 뭐’ 하는 허무 결론이 될 것 같았고. “사람이 그럴 수도 있죠” 하고 넘기기엔 그녀의 행동이 너무 짜증 나서 울화통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한 이 글의 중심은 이것이다. 똥 같은 행동을 골라하면서도 절대 똥이라 들키지 않는 그녀의 비결을 분석해보자는 것. 한마디로 ‘똥’이되 ‘똥’이라 불리지 않는 그녀(이하 ‘똥님’)의 약 5년간의 행적을 담담히 기술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1. 토양분석기 : 똥이 크는 환경은 중요하니까
내가 ‘똥님’을 만난 건 이직한 직장에서였다. 똥님은 나보다 8개월 먼저 입사한 30대 중반의 경력직 과장이었는데, 입사 후 회의실에서 진행한 1:1 오리엔테이션 때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회사는 일을 잘하는 게 중요하지 않아. 누구와 친하냐가 훨씬 더 중요하지”
그때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그 직장은 ‘계급’이 너무 확실한 곳이었다. 임원급 이상의 추천으로 입사하면 금수저, 힘 있는 계열사의 공채 혹은 경력직으로 들어오면 은수저, 일은 잘 못해도 튀지만 않으면 동수저, 끈도 없는 주제에 지 주장까지 강하면 흙수저 등.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똥님은 이런 정보를 회사에 지인이 많은 자신의 남편을 통해 이미 수집하고 있었다. 자신이 클 수 있는 환경, 즉 똥이 활개를 칠 수 있는 환경을 누구보다 빠르게 간을 본 것이다.
2.똥똥연대기 : 똥은 똥을 알아본다
똥님의 하루 일과는 단조로웠다. 아침마다 남편에게 “요즘 누가 실세인지”를 전화로 묻고, 오후엔 직접 그 실세를 찾아가 술 약속을 잡기 바빴다. 한 책상을 나눠 쓰는 옆자리 짝꿍으로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다고 뭐가 달라지지?’ 하지만 똥은 똥을 알아보는 법이다. 무수한 까임 끝에 그녀와 밀착한 실세가 있었다. 소문에는 똥님 이상으로 정치 욕이 강하고 우리 팀장을 꽤 미워하는 실세라 했다.
그와 결탁한 후, 똥님의 행보는 좀 과감해졌다. 팀장이 자리를 비울 때면 “부장님, 제 자리 좀 만들어 주세요” 하며 자리에서 전화를 하거나, 모두가 들으라는 듯 “내 앞길 막는 것들은 죄다 쓸어버리겠어” 하고 독백을 하기도 했다. 이 즈음엔 “팀장이 전 회사에서 횡령을 했다”는 소문도 여러 사람과 함께 설파하고 다녔는데, 공감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나를 보고 똥님은 한참을 웃었다. “너, 참 순진하구나!”
3.똥세확장기 : 한쪽으론 아부, 한쪽으론 결탁
재미있는 것은 모두가 똥님의 행보를 알면서 팀장에게 알려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당시 똥님은 팀장의 지극한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사 초기부터 혀에 사탕을 문 듯 ‘사탕발림’에 능한 그녀였기에, 그 까다로운 팀장도 똥님이 예뻐 어쩔 줄을 몰랐다. 일주일 내내 팀장과 밥을 같이 먹고, 같은 차를 타고 퇴근하는 등. 좀 상식 밖의 일이 실제로 조직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튼 똥님이 팀장의 눈과 귀를 막는 사이, 그녀의 심복들은 역할을 수행했다. 팀장에 대한 더러운 소문을 ‘복붙(ctrl V)’처럼 전파하고, 더 큰 실세에 붙어 팀을 두 파트로 나눈다는 프레임을 짠 것이다. 일찍이 똥님 눈밖에 난 나는 개인적으로 문자를 받았는데 내용은 이랬다. “이제 난 더 큰 파트에 가. 못 데려가서 미안!” 이후 팀장은 사임했다. 똥님과 그의 심복, 더 큰 실세는 한데 뭉쳐 한 파트가 되었다.
이후엔 짐작하듯 화병 나는 참 일들이 많았다. 새로운 팀장이 왔고, 하필 똥님이 결탁한 실세 부장과 친밀한 분이라 오직 똥님 파트만 총애했다. 가령 이런 구조였다. 똥님 파트가 못하는 일은 우리 파트에 오고, 그 일을 아무리 잘해서 던져줘도 똥님 파트의 공으로 돌아가는 구조. 반대로 똥님 파트는 일을 못해도 욕먹지 않았다. 왜? 그 파트는 힘 있는 금수저였으니까. 결국 ‘직장 내 똥이 말도 안 되게 커지는 비결’은 이 과정을 통해 화룡점정이 된다고 생각한다. 권력을 쥐고 상대를 똥으로 만들어, 내가 똥임을 피한다는 전략. 소위 선 긋고, 똥 세탁하기 전략 말이다.
독자들이여! 나의 긴 이야기를 들어주셔 감사하다. 남의 직장에서 벌어지는, 그것도 유명인이 아닌 듣보잡 과장의 이야기를 이렇게나 길게 써서 한 편으론 죄송하다. 하지만 그 ‘똥님’의 얼굴을 여러분이 볼 수 있다면, 아마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진짜 수더분하게 생겼네. 근데 저 사람이 그랬다고?”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또 한 가지 핵심이 추가된다. “그저 그렇게 생겨서 그런 행동 하는 사람, 의외로 많지 않나요?” 똥의 얼굴은 똥 같지 않다는 게 문제다. 어~하다 보면 어이쿠 하고 꼭 밟게 된다.
언젠가 똥님과 같이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똥님은 “잘 지내냐”는 물음에 동문서답을 했다. “새 팀장은 근본이 없는 사람이야. 경력이 지저분하잖아? 나랑 일하는 부장도 완전 짜증 나. 멘탈이 쿠크다스라니까”
그 길로 끝이었다. 똥님의 두 얼굴이 소름 끼치게 싫었던 나는, 그녀와 인연을 끊었다. 이후 팀장 앞에서 수줍게 웃는 그녀를 보며, 가끔 팀장과 함께 골프를 친다는 소문을 들으며, 속에서 뭔가 울컥할 때가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녀의 이중성이 크게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똥님이 쿠크다스라고 부르던 부장과 뭔가 얘기를 하며 지나갈 때면 이런 존경심마저 들었으니까. ‘똥님이, 참 난 년일세’
가끔은 똥님 같은 ‘스타일’을 지녀야 인생 편하다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이 글도 나름 열의를 가지고 썼는데, 그 과정에서 대상 포진이 두 번이나 왔다. 뭔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화딱지가 나는 DNA라니. 그래서 똥님이 내게 그렇게 솔직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빅 마우스가 아니라는 걸, 아마도 일찌감치 간파했을 테니. 혹은 회유 좀 하려다가 포기했을 수도 있다. ‘이 여자, 진짜 머리 회전이 똥 같네’ 하면서.
마지막으로 똥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똥님, 당신의 전략은 참 영리하네요. 매일 입에 달고 살던 ‘프레임’란 단어가 결국 무엇을 위해 쓰였는지 잘 알 것 같아요. 저는 당신 덕분에 아무 짓을 하지 않아도 똥이 된 삶을 살았어요. 일도 남이 버린 일만 하고, 승진도 줄줄이 막히면서요. 근데요. 제가 이 글을 뭐라고 끝내야 많은 분들이 만족할까요. 똥님처럼 살아라 하기엔 좀 껄끄러운 일들이 많고, 똥님처럼 살지 말아라 하기엔 세상이 똥 같다는 거 우리는 알잖아요? 맞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혹시 저만 꺼리는 건가요? 얼굴이랑 실명 화끈하게 공개할 생각 있으세요? 우리 한번 끝장 토론하면 뭐든 결론이 나올 것 같은데, Youtube 영상 주제로 진짜 괜찮지 않아요? 혹시 생각 있으면 연락 주세요. 조회수 잘 나오면 수익은 반땡 할게요. 좋은 게 좋은 거라던데, 이것도 신개념 공생 아닐까요?”
p.s 언젠가 똥님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이 대리는 가끔 참 똘아이 같단 말이야!" 내가 또라이라 생각한 이에게 또라이란 말을 듣는 것은 정말 기분 나쁜 일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N극의 또라이는 S극의 또라를 알아보는 걸까? 계속 충돌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