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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주 Sep 10. 2019

친하다면서 왜 뒤통수를 치지?  

<나 하나만 참으면 괜찮을 줄 알았어> 에피소드 05




그의 첫인상은 참 다정했다. “무슨 일이 있음 말해.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이미 한 번의 이직 경험이 있었던 나는 그의 친절에 감동했다. 이직을 해 본 분은 아시겠지만 회사를 옮긴다는 것은 마치 10단계 왕국 건설이 1단계 황무지 개척 수준으로 초기화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보통 이 시기엔 타인의 관심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러니 그녀, 아니 K과장의 한 마디는 내 호감을 사고도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쭉 그는 종종 내 자리로 와 안부를 묻고 업무를 살피고 가곤 했다. 아!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그 사이 난 K과장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계약직을 전전했으며, 입사 후 2년 만에 경력직으로 전환되었다는 것. 그 사이 상당히 서럽고 치사한 일들이 많았지만 그는 캔디처럼 이 과정을 이겨냈다고 한다. 왜? 불행히도 그의 남편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음악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늘 이 대목에서 눈물과 한숨을 지었다) 그렇게 10년을 버틴 결과, K과장은 회사에서 탄탄한 인맥을 구축했으며 최고의 브랜드의 권위자가 되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똑같은 레퍼토리로 수십 번 반복되었지만, 난 진심을 다해 그 말을 들어주었다. 그가 내 친구라고 생각했고, 굴곡 많은 그녀의 삶이 너무 불쌍해서였다. 그리고 또 어느 순간 나는 그의 일을 대신해주고 있었… 다? 그건 정말이지 마법 같은 일이었다. 그가 내게 호통을 친 적은 없었다. 단지 “난 이걸 못하겠어”라고 울상을 지으며 살포시 회의 자료를 놓고 갔을 뿐이다. 근데 가만! 그녀는 분명 브랜드 권위자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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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읽으며 혹시 당신 머릿속에 누군가 떠오른다면? 축하한다! 당신도 완벽히 당하고 계신 거다. 소위 회사 일을 거저먹으려는 ‘거지족’에게 눈탱이 밤탱이 되도록 맞고 계신 것. ‘거지족’들의 첫인상은 대체로 호감이다. 매력적이고, 사교적이고, 심지어 유머러스하다. (이 부분에서 난 K과장이 이야기 한 그 많은 농담과 시시덕거림을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이 적극적으로 누군가에게 접근하는 이유는 알고 보면 꽤 무시무시하다. 자신이 기생충처럼 피를 쪽쪽 빨아내야 할 ‘숙주’의 대상으로서 사람들을 공략하고 있는 것이니까.


‘거지족’이 극도로 공포스러운 이유는 누가 자신의 숙주가 되어야 할지도 빠르게 판단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주 타깃은 바로 ‘동정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누군가 기회를 갖지 못한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진심을 다해 변화의 계기를 주려는 이들 말이다. 하지만 반전은 이것이다. 쨍그랑~하며 우리가 동전을 준 그 거지가 막상 퇴근길에는 벤츠를 타고 갈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사는 집은 강남의 으리으리한 빌라라는 유주얼 서스펙트 (Usual Suspect)급의 반전 말이다!


나의 동정심이 누군가에게 악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심한 불쾌감을 준다. 나 역시 그랬다. 어느 순간 나는 내 일을 다 마치고도 집에 가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우리 딸 학부모 면담을 가야 해서…”, “자기야! 눈이 너무 침침해서 글씨가 잘 안 보인다? 이 엑셀 좀 대신 채워주겠어?”. 그가 슬그머니 맡기고 간 일은 어느새 나의 주 업무만큼 방대해졌다. 처음엔 그녀를 돕고 있다는 기쁨이 있었지만 갈수록 그 기쁨은 천불이 되었다. 특히 퇴근 네 시간 전부터 칠렐레 팔렐레 놀러 다니는 K과장의 모습은 더 이상 못 봐줄 지경에 이르렀고 모든 업무를 대신한 후에도 ‘나에게 돌아오는 보답이 없다’는 것은 한참 후에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팩트가 있었다. 숙주는 나 한 명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녀가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 같은 숙주들의 공동 작업 덕분이었다. 마치, 기계를 완성하기 위한 공장의 분업처럼 하나씩 하나씩 일거리를 나누어줬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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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 비트블룸이란 심리학자는 ‘거지족’들의 전략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정리한다. 1) 신뢰 구축하기 2) 호감 얻기 3) 동정심 유발하기 4) 결국엔 이용해 먹기. 오! 과연 심리학자다. ‘눈탱이 밤탱이 되도록 맞기’란 나의 저속한 비유를 이렇듯 논리적 과정으로 쉽게 이해시켜 주신다. 심지어 이 권위 있는 심리학자는 ‘거지 족’의 추가 패턴 또한 예리하게 찌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수법을 주변 사람들에게 골고루 사용하고 있다나? 그래야만 그런 행동이 오랜 기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나? 


나는 술자리에서 K과장의 뒷담화를 하며, 나와 똑같은 수법으로 당한 숙주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자꾸 본인은 못 한다 하며 부탁하더라고요”, “오늘 옷이 예쁘다, 언제 밥 한번 사겠다고 계속 알랑대요”, “야! 난 저번에 한번 거절했더니 엄청 화내던데? 회사에서 날 매장시킬 것처럼 말하다가, 결국 해줬더니 또 달라지더라. 역시 김대리 밖에 없다고 굽실대면서” 난 K과장을 향한 동정심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진짜 불쌍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리고 K과장에게 당한 사원, 대리급의 동료들까지. (아! 조직 피라미드의 짠 내 나는 저주여!) 


대개의 학자들은 K과장과 같은 ‘거지족’들의 원인을 그의 성장 환경에서 찾는다. 가령 “모든 것을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3-4세 연령에서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줬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린 그 이상한 사람의 행동을 또다시 눈감아 주게 된다. 두 주먹 불끈 쥐다가도 스르르 힘이 빠진다. 이건 정말 앙앙 울어대는 4세의 아기와 맞짱 뜨는 꼴이 되어버리니까. 


하지만 제발, 제발, 제발! 그들은 그냥 거지일 뿐이다. ‘기브 앤 테이크’가 명확한 사회에서 늘 테이크만 하려는 나쁜 사람들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이건 유사 범죄 행위이다. 누군가의 물건을 직접 훔치는 대신, 그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난 너의 친구지롱~) 보석을 스스로 내어 놓게 만드는 범죄행위! 심지어 그를 위해 삼각김밥을 먹으며 야근을 자처했던 그 순간에도 그들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었던 거다. 아마 그들은 회사를 벗어나 이런 말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거 뭐야? 너무 쉽게 속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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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거저먹으려는 이 ‘거지족’들에게 더 이상의 동정은 필요 없다.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더 이상 안돼!”를 외쳐야 한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왜냐면 그들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뽑아 먹기 위해 장기 투자를 한 만큼 떼어내려는 그 순간에도 찰거머리처럼 들러붙기 때문이다. 


나는 K과장에게 말했다. “죄송한데, 이번엔 안 되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쉽게 나가떨어지지 않는다. “자기 갑자기 왜 이래” 하지만 절대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된다. 이후로도 K과장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달래고, 윽박지르고. 상사를 이용해 압박하기도 했다. (부장님은 말했다. “K과장 인맥이 장난이 아니라던데, 그냥 좀 해 줘”) 하지만 결국 안 되니 나중엔 제풀에 지쳐 떨어졌다. 정확히 1년 6개월 만에 겨~우!


앞서 언급한 모니카 비트블룸이란 학자는 거지족들에 대한 대처로 ‘희생자들의 공동 연대’를 주장한다. 함께 힘을 모으면 대항하기 훨씬 수월하다는 것이다. 음, 그래, 이건 정말 좋은 방법인 것 같지……만? 솔직히 너무 아름다운 주장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연대의 과정에서 꼭 배신자가 생긴다는 점이며, 나를 향한 불이익은 두세 배로 커질 수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난 그 정도로 조직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같은 대처가 함축하는 가장 명확한 의미는 “거지족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수년간 사자를 잡지 않고도 맛있는 고기를 먹어 온 이들에게 갑자기 사자를 잡으라는 말은 웃기지도 않는 난센스다. 그러니 기억하자. 혹시 잊으면 반복해 암기해 보자. 이해되지 않더라도 반복해 암기하자. 거지족들과의 이별은 바로 이 한마디로 시작한다. “내 인생에서 제발 꺼~~~~~~져 달라고!” 


동전을 던져주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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