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편집숍 아이템 01] 마돈나 Vogue, 1990
살다 보면 사람이 징하게 '맛'이 가는 날이 있다. 마치 규격화된 범생이가 심하게 일탈하듯, 온갖 허울을 다 벗어던지고, 그냥 내 영혼의 재즈에 따라 '슬로우 퀵퀵' 스텝을 밟는 그런 날 말이다.
솔직히 17년 직장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부품처럼 살아야 할 대기업에서, 혼자 액셀을 밟다 보니. 궁중비화 뺨치는 음해에, 거친 쌍욕도 누구보다 많이 겪었지만. “그래도 네가 있어, 이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인정해 주는 좋은 상사와 동료들도 참 많았다.
문제는 이렇게 직장생활이 점점 안정화되다 보니, '직장 안의 나'보다 '직장 밖의 나'가 더 두려워졌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뭘 좋아하던 사람이었지?” 이 질문에 쉽게 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느 순간 나는 눈앞에 닥친 일들을 능숙한 기계처럼 무심하게 처리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 두려움과 익숙함이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격해지던 날. 나는 팀장님에게 훌쩍 '퇴사'를 선언했다. 물론 입사 전 겪은 약 3년의 처절한 백수시절이 떠올랐지만 (삼각김밥과 믹스커피로 연명한 그 시절이여!), 어쩐지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도무지 안 될 것 같았다. 내게 진짜 두려웠던 건, 지금의 따뜻한 안정성보다 '그냥 이대로 살아버릴 것 같은' 어떤 미래였으니까.
그래서, 그날의 내 기분은 딱 이것이었다. “너 이대로 살래? 아님 다시 시작할래?”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내 마음속 거센 일탈은, 딱 이 한마디로 충분했던 것 같다.
“오늘은 어쩐지 퇴사해야겠는데?”
퇴사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오스트리아 여행'을 떠난 일이었다. 한없이 무거운 숙제였던 '퇴사'를 해결하니, 이후 마음은 새털같이 가벼워졌다.
'퇴사'란 결정을 위해 몇 년간 대출금, 마이너스 통장, 보험금까지 계산기를 수백, 수천 번도 더 두드렸었는데. 결국 이렇게 엄청난 돈을 여행에 훅 질러버리다니. 속으론 이런 말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와, 내가 정말 미쳤구나”
어쩌면 인생의 혜자로운 순간들은 '완벽한 계획'이 아닐지도 모른다. 20대라서 취직을, 30대라서 결혼을, 40대라서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그 모든 수식어들은, 솔직히 나를 한 번도 자유롭게 한 적이 없었으니까.
반대로 내가 잃었던 건, 20대에 불사를 수 있었던 드라마 작가의 꿈, 30대에 더 단단해졌어야 할 감정적 독립심, 그리고 40대에도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한 내 모습이었다. 솔직히 가끔 아이들이 속을 썩일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었지. “내가 누군지도 아직 모르겠는데, 너희들을 돌보고 있다니.”
아무튼, 패키지여행에 익숙했던 내게 오스트리아 여행은 엄청난 생각의 전환이었다. '파워 J'의 성향을 모두 버린 채 훌쩍 비행기에 올라타고. 오랜 비행시간 내내 아무 생각 없이 '하늘멍'을 반복하고. 흐르는 시간을 따라 자다, 깨다, 먹는 것을 반복한 여행. 그 단조로운 흐름 끝에서도 목적지는 결국 내 눈앞에 있었다.
막상 오스트리아에 도착해서도 '대단한 무언가'를 한 것은 아니다. 하루는 하릴없이 비엔나 시내를 밤늦게까지 걷고, 또 그다음 날은 훌쩍 기차를 타고 한적한 시골 수도원을 방문하고. 그러다 너무 배가 고픈 날이면 예쁜 골목길들을 걸으며 각종 빵과 디저트를 무한 흡입하기도 했다.
이건 평소의 '나'라면 전혀 시도하지 않았을 여행코스들이었다. (패키지 투어에, 무조건 많이 본다는 '뽕빼기' 전략은 익숙한 루틴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익숙한 중력을 벗어날수록, 뭔가 새로운 '나 자신'이 보였다. 문득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들, 실바람처럼 감기는 삶의 여유로움, 그리고 그 안에서 더 새롭게 보였던 낯선 풍경들까지.
낯선 땅에 나를 던져놓자,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하고, 적고, 다시 그 생각을 편집해 내는 나의 온전한 기쁨이.
여행 4일째. 하루 종일 걷느라 녹초가 된 몸을, 푹신한 호텔 침대에 던져 넣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무심히 핸드폰을 켰고,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유튜브 알고리즘에 끌려 '바로' 그녀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What are you looking at? Strike a pose.” (뭘 보고 있어? 포즈를 취하라고!)
1990년대, 뮤직비디오 'Vogue'에 등장한 마돈나. 강렬한 흑백화면 속 그녀는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한 손에 턱을 괴고, 고개와 허리를 과감하게 꺾고. 각각의 포즈는 마치 정지된 사진처럼 선명했다. 그녀는 구태의연한 댄스가 아닌, '명확한 멈춤'을 통해 자신을 말하고 있었다. “이거 봐. 다들 봐. 이게 바로 나라고!”
그건 정말 우연이었을까? 우주의 그 어떤 신도 믿지 않지만, 정말이지 가끔은 마치 '신의 계시' 같은 일들이 거짓말처럼 일어난다. 비엔나의 작은 호텔 방, 내가 핸드폰을 켠 그 순간도 정확히 그러했다. 마돈나가 던지는 Vogue의 모든 가사들이, 마치 나를 향해 울리는 엄청난 계시이자 메시지처럼 느껴졌으니까.
When all else fails and (모든 것이 실패하고)
you long to be something better than you are today (더 나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I know a place where you can get away (나는 네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을 알아)
You called a dance floor (당신이 댄스 플로어라 부르는 곳)
Come on, vogue (보그춤을 춰봐)
Let your body go with the flow (네 몸을 음악에 맡겨봐)
All you need is your own imagination (네게 필요한 건, 너 자신의 상상력뿐이야)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마돈나가 말하는 '포즈' (pose)는 단순한 동작이 아니었다. 그건 세상에 날 선언하는 하나의 태도였다. “나는 이렇게 서 있는 사람이야”, “너만의 포즈를 만들라고.” 그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거친 세상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자신을 스타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물론 직장생활을 하며 내가 취한 모든 '포즈'들을 후회하진 않는다. 광고 카피라이터, 대기업 브랜드기획자. 한때는 자부심이었고, 엄청난 동력이었던 그 타이틀들은 내 인생의 전반부를 채운 일종의 훈훈한 성과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시간이 갈수록 답답했던 건, 아마 그 세계 안에서 내가 취해야 할 '포즈'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적당히 성과를 내고, 적당히 공손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그 '포즈'들이 어느 순간 거추장스럽고 불편했었다. 조금 서툴고, 즉흥적이고, 가끔은 필에 취해 지나치게 열정적이어도 “그냥 이게 나예요” 말할 수 있는 새로운 '포즈'가 내겐 필요했던 것 같다. 나를 새롭게 정의하고, 내 상상력을 더 불태울 수 있는, 어떤 새로운 포즈.
그래서 뮤직비디오가 끝나갈 무렵,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나만의 '포즈'를 선언할 수 있었다. 조금 극적이고, 조금 손발이 오그라드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게 정말, 그때의 내 심정이었으니까.
“나는 지금부터 생각을 편집하는 사람이다.”
“나는 나만의 포즈로 세상을 본다”
퇴사 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솔직히 그건 대단한 명함을 만들거나, 대단한 사업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만의 '리얼 포즈'를 찾는 것. 내가 어떤 각도에서, 어떤 태도로 세상과 마주할지를 결정하는 것. 단지 그것이 전부였다. 그 포즈가 비록 세상에서 비웃음을 당할지라도.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제시하는 '생각편집숍'의 아이템은 이것이다. 생각의 첫걸음을 시작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 진지한 걸음을 누구보다 열렬히 응원하기 위해. 진심으로 펜을 꾹꾹 눌러 내 마음을 전한다.
[생각편집숍 아이템 01. 마돈나 Vogue, 1990]
생각도구 : 나만의 포즈를 찾는 용기
효능 : 정해진 틀 대신, 나만의 각도에서 세상을 보는 힘
"Strike a pose. All you need is your own imagination."
포즈를 취해봐. 네게 필요한 건, 너 자신의 상상력뿐이야.
오늘도 이렇게, 생각 하나 질렀습니다.
당신의 리얼 포즈가 시작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