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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Oct 19. 2022

언니 1

언니는 나보다 두 살이 많다. 우리는 7남매. 아들 넷에 딸이 셋이다. 아들 하나 낳고 딸 하나 낳고 두 해 너머 소식이 없자 할아버지는 후처를 들여 아들을 하나 더 낳을 계획까지 세웠다는데, 엄마는 얼마 안가 아들을 셋이나 연거푸 낳았다. 계속 아들만 셋을 두자 이제는 딸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래서 언니는 모두가 기다리던 아이로 태어났다. 대신 나는 모두가 다 있으니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아이로 태어났고.  

 언니는 기다렸던 아이였던 만큼 어려서부터 예뻤다. 다소곳하고 얌전했다. 키는 작지도 너무 크지도 않았다. 오빠들은 그런 언니를 귀하게 여기고 아꼈다. 언니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막내 오빠는 성문종합영어를 사 주었다. 

  어느 날 언니의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다. 

- 와, 나는 네가 굉장히 잘 사는 집 딸인 줄 알았어

 우리 집은 그렇게 잘 사는 집은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의 월급에 기대 할머니까지 열 식구가 먹고살던 시절이었다. 무슨 귀티가 흐르고 있어서, 어린아이들이 보기에도 언니는 귀한 집 딸로 보였나 보다. 나 스스로 우스갯소리로 '언니는 우유를 먹고 자랐고, 동생은 배급용 빵을 먹고 컸다'라고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나는 늘 열등감이 있었다. 그 열등감의 뿌리가 언니였다는 생각이 든다. 열등감의 습성은 늘 남과 비교하려 들고, 그 비교를 속으로 숨기려 한다. 안 그런 척하지만, 속으로는 잘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못난 구석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늘 미모와 지성을 갖췄다는 칭찬을 듣고 사는 언니 밑에서, 나는 나만의 철학을 쌓아야 했다. 예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는 것, 타고난 것보다 노력이 더 우월하다는 신념 등등. 때마침 유행가의 가사도 나를 지지해주었다.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예뻐야 여자지


누구의 노래였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노래는 못난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래 그렇지.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언니를 만회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딸이 밤늦게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늦게까지 불을 안 끄고 있으면 방으로 와서 불을 꺼버리고 나가셨다. 그것이 전기세 때문이었는지 나의 건강을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묻기도 전에 울어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더 독해졌다. 

 같은 방을 썼던 언니도 밤늦게 불을 켜놓고 공부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니의 공부는 할 수 있는 것만큼 하는 정도였다. 억지로 애를 써서 어느 경지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공부했고 우수한 성적까지만 유지했다.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 얼굴도 예쁜 학생으로 통했다(언니와 나는 같은 중학교를 다녔고, 나는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의 동생으로 통했다. 나는 언니가, 별로 예쁘지는 않지만 공부는 잘하는 학생의 언니로 통하기를 원했다). 내가 온 힘을 들여서 공부를 했다면 언니는 힘을 빼고 공부를 했다고 할까. 그렇다고 내가 아주 우수하게 동네가 알 정도로 잘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부모님이 별 신경을 안 써도 잘하는 정도였다. 엄마는 그런 나를 기특해했지만 큰 기대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공 안 들이고 낳은 막내가 공부를 잘하니 괜찮네, 하는 정도였다. 

 밤늦게까지 스탠드를 켜놓고 있는 것이 불편해지자 나는 다락방을 선택했다. 그러나 불도 들어오지 않는 방이라 여름이 아니고서는 쓸모가 없었다. 겨우 다락방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다, 먼 산을 바라보다, 우수에 젖어 있다가, 폼만 잡고 내려올 때가 많았다.

 나의 든든한 후원자는 부모님도 형제도 아니었다. 나의 후원자는 책이었다. 나는 소설 속으로 들어갔다. 책 은 나에게 은밀하고도 넓은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주었고, 그것은 현실의 것을 대신할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 나는 문장 하나에서 힘을 얻고, 그 문장들 틈으로 숨어들었다.  

 

 서른아홉에 나를 낳은 엄마는 내가 철이 들 때부터 이미 오십이 훌쩍 넘은 나이라서 한창 커가는 복잡한 여자아이의 심사까지 신경 써줄 여력이 없었다.  중학생이 되자 성문종합영어를 선물 받았던 언니와는 달랐다. 

 그리고 아무도 나의 인생에 대해 조언해주지 않았다. 언니가 첫 번째 연애에 실패하고 고모 집에 가 있을 때, 오빠들이 찾아가서 집으로 데려 왔다. 감싸 안듯이. 그리고 언니의 아픔을 쉬쉬하면서   따뜻하게 덮어주었다. 그런 모습이 나는 부러웠다. 내가 만약 그랬다면? '과연 집 식구들이 그렇게 했을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나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그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항상 그랬다.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보호막을 단단히 쳐야 했다.  


 내가 서울로 대학 진학을 고집하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막내, 니는 키도 작고 한께 서울로 가거라"

엄마는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가야 언니와 비등해진다고 생각했나 보다. 덕분에 언니는 지방의 국립대를 선택했고 나는 서울의 비싼 사립대를 나왔다. 나는 언니의 미모 외에 더 가질 수 있는 것을 셈했다. 물론 산다는 것의 선택에 항상 언니가 그 기준이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릴 적에는 그런 셈을 하곤 했다. 내가 언니보다 더 가질 수 있는 것... 실력, 학벌, 지성, 인간관계, 옳은 일을 한다는 정의감, 등등!  그런 것을 탐했다. 책을 읽었고, 데모를 했고, 사회단체에 들어가 활동했다. 


 언니와 둘이서 아버지 산소를 성묘하러 갔을 때였다. 산소까지 올라가는 길은 가팔랐고, 울퉁불퉁했다. 둘 다 그곳의 처지를 잘 모르는 것은 같았다. 산소 주변에 감나무가 있었다. 아마 큰 오빠가 심어놓았을 것이다. 감나무에 제법 큰 감들이 익어가고 있어서 욕심이 났다. 따 가지고 가기로 했다. 따가기로 했지만,  나는 경사진 비탈을 오르락거리며 부지런히 감을 땄고, 언니는 나무 옆에서 무연히 서 있었다. 나는 언니가 신고 온 구두가 망가질까 봐, 운동화 발로 부지런히 오르내렸다. 한아름 딴 감을 언니 품에 안겨주면서, 그때 난 문득 생각했다. 아, 나는 무수리구나.  언니는 공주처럼 서 있고, 나는 공주의 무수리처럼 가시에 찔리면서 감을 따고 있었구나. 당연하게 언니는 공주, 나는 무수리. 내면에 깊이 똬리 틀고 있던 모자란 생각이 튀어나왔다. 그냥 내가 더 그런 일을 더 좋아하는 것이라고, 익어가는 감을 놓치기 힘들어서라고, 내가 더 먹을 것을 챙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나를 모자라게 만드는 건 나 자신이다. 누구도 그렇게 나를 명명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나 자신을 부족하고 모자란 인간으로 만들어놓는다. 열등감도 나 스스로 만들어 놓은 벽이다. 나는 언니를 핑계로 성벽을 쌓고 스스로 그 안에 갇혀 살았다. 나보다 예쁜 언니를 가졌어도, 나는 나대로 당당할 수 있었을 텐데, 나의 사춘기는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춘기의 기억이 오래도록 나의 내면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쁘고 귀하게 살았던 언니가 아프다. 암이 진행되어서 2년 정도 남았다는 선고를 받았다. 드문드문 안부 전화를 한다. 지금은 어떠냐고... 언니는 항암치료 때문에 힘들어한다. 속이 메스껍고 힘이 없다고 했다. 언니를 늘 열등감의 출발지로 여기고 살았어도, 막상 언니가 아프다는 말을 내뱉을 때는 눈물이 먼저 나온다. (언니의 아픔을 얘기하려고 시작한 것이 나의 얘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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