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사진관에서의 여권사진.
"여기 주름을 좀 보세요. 좌우가 완전 비대칭이에요. 아.. 이건 정말 심각한데?"
이 이야기를 들은 곳이 피부과라면, 혹은 성형외과라면 아.. 나에게 필러를 팔고 싶구나라고 대충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곳이 '사진관'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늦은 일요일 오후, 초딩 육 학년 둘째 아이와 함께 여권사진을 찍으러 갔다. 코로나 이후 4년 만에 가는 해외여행을 위해 찍는 여권사진이었다. 몇 군데 전화를 돌려보다, 평점이 적어서 찝찝하긴 하지만 집에서 가깝고 일요일에도 열며 무려 오천 원 할인 이벤트를 하고 있는 사진관에 가기로 했다.
둘째와 함께 목욕재계를 하고, 나는 다이슨 에어랩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컬을 넣었다. 아이는 고대기로 열심히 과하지 않으면서도 얼굴이 작아 보이는 앞머리 뽕을 넣었다. 나는 회사 프로필 사진업로드 용으로도 사용하기 위해 선명한 화장을 하기로 해서 Nars 드래건걸(셋 빨간 립스틱)로 입술을 평소보다 과하게 발랐다. 튼 딸은 엄마 너무 예쁘다며 쌍따봉을 외쳤고 뭐 그때까진 기분이 좋았다. 사진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동네 사진관엔 노부부가 가족사진 상담을 받고 있었다.
"싼 곳보단 제대로 된 곳에서 찍으셔야 해요. 고객님들은 무조건 가격만 보시는데 사진을 보셔야 한다니까요 제가 그런데 사진을 보면 화가 나요 화나가!!"
사진관 사장님은 열과 성의를 다해 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액자 두 개 정도를 만들면 65만 원이 든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고 사장님의 사진에 대한 자부심이 넘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부부가 상담을 끝내고 나가자 우리 차례가 되었다. 봄바랑이 살랑이는 한가한 일요일 오후의 스튜디오에는 나와 딸 둘만 남았다.
"따님은 앞머리를 까셔야 해요. 여권사진엔 앞머리가 눈썹을 가리면 절대 안돼요"
아이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이 앞머리가 어떤 앞머리 인가? 삼십 분 동안 한 올 한 올 (고데기의) 열과 성의를 다해 과하지도 적지도 않게 말아 내린 앞머리가 아닌가. 아이는 아주 조금씩만 앞머리를 넘기다가 사장님께 모두 탈락되고 결국 왁스로 앞머리를 옆머리에 붙인 청학동 앞머리를 만들고야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내 경우는 자신 있었다!
앞머리도 없었고 다이슨 에어랩의 컬은 적당했고, 나스의 새빨간 립스틱은 인상을 선명해 보이게 했다. 탈의실에서 운동복을 벗고 결혼 전에 산 적어도 내 옷장 안에서 제일 비싼 정장 마이를 걸쳤다. 츄리닝에 마이라며 아이는 경악했지만 괜찮다고 다독였다.
괜찮아. 사진은 상반신만 나오니까. 잠옷바지를 입던 쓰레빠를 신던 그건 안 나와..
나는 의자에 앉아 회사에서 쓸 프로필 사진용 반명함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회사 프로필의 나는 긴 생머리를 한 오 년 전 모습인데 회사사람들이 제발 현행화해달라고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였다 사진관 사장님의 나를 향한 디스..
"비대칭이 많이 심하세요.. 뭐.. 최대한 해보죠 뭐. 여권용은 웃지 마시고. 반명함용은 웃어주세요."
"아.. 몸이 많이 삐뚤어졌네. 얼굴도 그렇고.."
촬영이 끝나고 절대로 보정 전 사진 따위는 보고 싶지 않은 나를 사장님은 보정실로 불러냈다. 65인치 대형 모니터에 보정되지 않은 내 얼굴이 발가벗겨져 있었다. 모공과 주름 그리고 비대칭. 내 위내시경 촬영본, 두피 속 꽉 막힌 모공 그리고 보정 전 나의 모습은 절대 절대 보기 싫은데 말이다.
"고객님의 경우는 매우 심각하세요. 비대칭이 말이죠."
"아 그런가요?"
"네. 매우. 뭐랄까. 고생만 하며 산 얼굴이랄까? 평생 고생만 하고 사셨네.. 생기가 하나도 없어요. 힘이 빠진 얼굴이랄까?"
"하하.. 오랜만에 사진을 찍어서 표정이 굳었나 봐요"
(속으로 말함) '남편은 이렇게 본인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자유로운 영혼은 처음이라고 하는데요?'
"삶을 포기한 듯한.. 마지못해 사는 사람이랄까?"
(속으로만 생각) '저.. 여행 가려고 여권 사진 찍으러 온 거예요. 영정사진이 아니라.'
"아.. 이건 너무 심각하네요. 수면의 문제일 수도 있고.. 일단 매일 스트레칭이라도 하세요"
(속으로만 생각) '저 주 3회 태권도 다니는데.. 잠은 누우면 5초 컷이고..'
"잠을 왼쪽으로만 주무시나? 왜 이렇게 삐뚤어졌지?"
(속으로만 생각) '누워서 웹툰을 많이 보긴 합니다...'
졸지에 굴곡 있는 삶을 살아간 고생만 많이 한 가련한 중년의 여인이 되어버린 나의 사진과 청학동 소년이 되어버린 내 딸의 사진을 들고 무려 4만 5천 원이나 결제했다. 사장님은 깨알같이 네이버 후기를 남겨달라고 했다. 네.. 꼭 남길게요.. 이를 악물고 대답하자 하자 사장님은 지금 당장 남기란다. 그래야 오천 원 할인을 받을 수 있다고.
'최고의 사진관~ 앞으로 사진은 여기서만 찍으려고요 완전 사진 맛집'
이라고 손가락이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오천 원에 영혼을 팔아재 낀다. 터덜터덜 걸어 나온다. 여권사진이 아니라 영정사진을 찍고 나온 기분이랄까.. 사만오천 원을 내고 사십오만 원어치 욕을 한 묶음 사가지고 나온 기분이랄까..
" 있잖아. 엄마가 그렇게 고생한 얼굴로 보여? 친구 엄마들 얼굴 좀 생각해 봐"
"엄마 절대 아니야. 여기 좀 별로인 거 같아 다시는 오지 말자"
"그러니까 엄마 얼굴이 좀 그렇냐고?"
"절대 아니지만 꼭 이야기해야 한다면 할머니 립스틱 같은 거 바르고 나와서 그런 거 아닐까?"
"할머니 립스틱이냐니.. 이거 나스 립스틱이야. 사만오천 원짜리. 막 이십 대들도 많이 발라( 몇 년 전에 산거긴 하지만)"
"엄마 비싼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번주에 나랑 올리브영 한번 가자 내가 싹 바꿔줄게 여하튼 그건 할머니 립스틱 같아."
생각해 보니 엄마가 바르는 립스틱이랑 같아 보인다. 문득 사진을 보니 엄마 얼굴이 보인다.
남편한테 톡을 보낸다
"자기야. 나 평생 고생만 한 얼굴로 보여?"
"왜? 누가 뭐라고 해?"
"아니 솔직히 본인의 생각을 말해봐"
"전혀 아니지 이쁘기만 하지"
"사진관 아저씨가 나보고 평생 고생에 찌든 얼굴이래"
"이상한 사람이네 "
"그렇지? 그 아저씨가 이상한 거지?"
"사진 좀 보내봐 내가 봐줄게"
"이쁘기만 하고만.."
"역시 자기가 최고야."
나 취업해서 늙은 걸까?
아님 작년에 논문이랑 내 동안 얼굴이랑 맞바꾼 걸까?
나 평생 동안 소리만 들었는데. 막 삼십 살 때도 맥주 사려면 신분증 검사받고.
피부과 김간호사님 말처럼 이제는 보톡스를 맞을 용기를 내야 할 때일까?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생각이 많아지니 얼굴의 비대칭이 더 심해지는 기분이다. 잔주름이 더 느는 기분이다.
집에 가서 중3 큰딸에게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묻는다
"엄마 늙어 보여? 막 고생 많이 한 얼굴이야?"
"뭐 나 때문에 고생하시긴 했죠. 늙어 보이진 않아요 딱 엄마 나이 마흔세 살처럼 보여요"
아.. 그렇구나.. 나는 딱 내 나이로 보이는구나..
문득 나스 드레곤걸을 그만 발라야 할 나이라는 게 느껴진다. 이제는 빨간 립스틱이 청순섹시로 보일 나이는 지났으니까.. 그래 이 정도 닿았으면 그만 쓰자..
그리고 생각한다.
사진관 사장님의 무례한 선의일지 모른다는 생각말이다.
그것은 어색한 분위기를 잠재우려는 스몰 토크였을지도 모르며, 어쩌면 평생고생만 한 듯 보이는 나를 위한 선의이자 배려일지 모른다는 생각말이다. 그럼에도 그런 선의라면 거부하고 싶으며, 또 한편으로는 나 또한 그런 무례한 선의를 내비친 적은 없는지 생각해 본다.
배려를 가장한
위함을 가장한
무례한 배려이자 선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