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이와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구씨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가 봉다리에 담긴 소주 병을 무릎과 부딪히며 미정이 옆을 건널 때면 내 마음도 설렜다. 어느 날 알코올 중독자인 그에게 미정은 다가간다. 그리고 "나를 추앙해요."라는 명대사를 내뱉는다. 할 일이 없는 것 같으니 구씨에게 자신을 추앙하라고 명령한다. 3남매의 막내, 다정하진 않지만 속 깊은 부모님에 둘러 싸인 미정과 달리 구씨에겐 가족 이야기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그에겐 수많은 소주 병과 술잔이 있을 뿐이다.
자기심리학의 창시자, 하인츠 코헛은 병리적 자기애의 결과로 중독 증상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병리적 자기애란 "자기(self)"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자기감의 결핍은 무서우리만큼 지독한 공허감을 유발한다. 필립 플로레스는 하인츠 코헛의 관점에 동의하며 사람들이 중독에 빠지는 이유는'애착의 결핍' 때문이라고 부연 설명한다. 또 애착 때문인가 싶을 정도로 초기 애착은 지독할 정도로 우리를 따라다닌다. 구씨 역시 자기감과 애착의 결핍이 있었을까? maybe.
프랑스 정신분석가 라캉은 이 결핍감을 인간 정신의 핵심 구조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평생 무언가 부족하다는 결핍감에 시달리며 무언가를 욕망하지만, 그 욕망을 충족하기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욕망하는 것 자체에서 인간은 오묘한 희열을 경험한다. 인터넷 쇼핑 연구에 따르면 뇌가 가장 격렬하게 반응하는 때는 물건을 손에 쥐는 순간이 아니라 택배 박스를 여는 순간이라고 한다. 어쩌면 연애 시기에 열렬히 사랑하다가 결혼 후에는 그 낭만적 사랑이 사그라드는 것도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대상을 욕망하는 것 자체에 대한 욕망, 그것이 불러오는 쾌(快)로 인해 삶의 동력을 얻는다.
지하철을 타보면 각자가 바라보는 대상이 동일하다. 현대인들 대부분이 스마트폰 중독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우리가 과연 중독에서 자유로울까. 알코올이나 마약류, 도박같이 위해한 중독이 아니라면 이 정도의 중독은 괜찮다고 치부해도 되는 걸까. 어떤 행위로 인해 삶의 문제가 지속되지만 그 행위를 통제할 수 없다면 중독이다. 그리고 중독은 삶을 생생하게 살아가지 못하도록 삶을 갉아먹는다.
무언가 중독되어 있다고 생각된다면 나에게 어떤 결핍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특히 나의 애착의 결핍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심각하게 손상된 애착은 심각한 중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애착의 손상이 있었다면 손상이 있었던 마음의 자리를 가리킬 수 있어야 한다. 중독 역시 자신이 중독자임을 인정하는 순간 치유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현재 나에게 의미 있는 타인과 애착을 복구하는 여정을 통해 중독 행위로부터 조금씩 해방될 수 있다.
아마 구씨는 미정과의 사랑을 통해 헤아릴 수 없이 깊었던 결핍과 공허로부터 해방되어 갔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