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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호박 Sep 07. 2021

복 중에 최고는 먹을 복


친구와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사주 풀이를 했다. 거짓말처럼 5년마다 일어나는 힘든 일들 때문이었다. 나는 평생 기독교였고 그래서 사주는 더욱 믿지 않았지만 MBTI도 믿고 별자리 운세도 보는데 사주는 안 볼 이유가 뭐람? 싶은 마음이었다. 게다가 아빠는 종종 점을 보러 다녔고 거기서 가끔 내 인생에 대해서 점쟁이에게 묻기도 했기 때문에 내 팔자는 그저 그렇지만 나쁘지도 않다는 걸 대충은 알고 있었다. 나는 사주풀이 사이트에 당당하게 들어가 내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각을 설정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확인 버튼을 눌렀다.


년주와 월주는 텅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고 일주와 시주에만 두 가지 복이 있었다.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서 여러 블로그를 쏘다녔다. 대충 년주와 월주는 각각 초년 운과 성년 이후의 부모, 형제간의 관계를 나타난다는 결과였다. 사실 나는 아주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고, 성년 이후에 겪은 어려운 일도 대부분 부모님이 주원인이었기에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렇다고 우리 가족이 서로 아끼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 또한 없다. 우리가 이렇게 힘든 건 사랑해서 그렇기 때문이라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일주와 시주에 두 가지 복이 있다는 걸 기쁘게 생각하면서 어떤 복인지 찾아보았다. 일주는 귀궁과 식궁, 시주는 복궁과 길궁이었다. 많은 블로거는 나에게 일주는 청년 시절에 만나는 배우자와 가정, 시주는 노년의 운수를 나타낸다는 걸 알려 주었다. 네 가지 복 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복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일주에 있는 '식궁'이었다. 식궁은 말 그대로 먹을 복이었다. '먹을 복이 있으니 가는 곳마다 잔치다 고대광실 좋은 집에 영하가 가득하다'라고 적혀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딜 가나 굶진 않았다. 오히려 잘 먹고 다녔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다.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도 회사에서 잘 먹고 다니는 내 모습을 보며 평일에도 주말에도 맛있는 것만 먹는다고 질투할 정도니까. 외롭다고 생각하던 어린 시절에도 나는 늘 아침, 점심, 저녁을 꼬박꼬박 다 맛있게 먹었다. 음식 솜씨가 뛰어난 할머니 덕이었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독립을 한 이후엔 손이 큰 엄마의 반찬 덕분이었다. 먹을 복과 음식의 경험은 늘 나에게 좋은 기억만 남겨 주었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 나의 입맛을 까다롭게 만들어 준 사람이다. 저녁은 당연하거니와 아침에도 지각하는 나에게 늘 김밥을 싸주었다. 보통 김에 밥을 싸서 입에 넣어주는 엄마들의 김밥 사진이 인터넷에서 많이 보이는데, 우리 할머니는 거기에 달걀지단을 부쳐 보너스로 넣어 주었다. 주말 점심에 먹는 간장국수도 평범한 간장국수가 아니었다. 애호박과 양파를 단맛이 날 때까지 오래 볶아 삼삼하게 간을 한 간장국수에 무심하게 툭 넣어주셨다.


특히나 할머니가 만든 된장찌개는 나의 소울푸드였다. 할머니는 몇 년에 한 번씩 메주로 된장을 만들었다. 집에 있는 전기장판을 모두 안방에 모아서 메주를 따뜻하게 감싸 며칠을 있었다. 그럴 때면 온 집안에 청국장 냄새가 났다. 냄새에 예민한 청소년 시기였지만 교복에 청국장 냄새가 배어도 괜찮을 만큼 된장찌개가 좋았다. 할머니는 허리가 아파 움직이기 힘들 때도 된장을 몇 솥이나 만들었다. 그때는 힘든데 이런 걸 왜 하냐고 화를 냈지만 할머니가 떠나고 5년이나 부족함 없이 그 된장을 먹고 있는 걸 보면 할머니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집에 홀로 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가 있었다. 마음이 바닥에 있는 상태에서 혼자 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을 아주 오래 잤으며, 영화를 자주 보았고 종종 책에 기대어 시간을 보냈다. 정혜신 박사님의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주 울 때가 있었다. <정혜신의 사람 공부>에 나온 한 구절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음식은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많이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예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했던 기억에는 늘 음식이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밥상에 치유의 본질이 들어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나는 된장찌개를 끓일 때 할머니를 자주 생각한다. 종종 아빠가 할머니의 된장으로 찌개를 끓여주면 할머니의 찌개가 훨씬 맛있다고 말한다. 식당에 가서 흔한 고등어 정식을 먹을 때면, 어릴 적 무와 함께 푹 끓인 고등어조림이 올라간 엄마의 식탁을 떠올린다. 떡볶이를 먹을 때면 나의 오랜 친구 다솜을 떠올릴 것이고, 지나가다가 치킨 냄새를 맡으면 치킨을 참 좋아하는 남자친구를 생각할 것이다. 내 평생 피자메이트 동생도 빼먹을 수는 없지. 그리고 아마 남은 생 동안 여진을 잊을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마라샹궈를 함께 먹고 거하게 체했고 나는 결국 맹장수술까지 했으니까. 비록 내 사주에 년주와 월주는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잊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참 많다. 아무래도 복 중에 최고는 먹을 복인 것 같다.



3주간의 유럽 여행을 끝난 후 돌아온 날, 할머니가 준비해 준 식사 (청국장과 삼겹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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