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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n 03. 2024

다윗과 골리앗을 보는 관점 차이

서양과 동양이 골리앗을 이긴 다윗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개인주의가 발전한 서양은, 어린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용감하게 맞서 싸워 이긴, 개인 이야기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영웅으로 소개합니다. 

다윗의 용기와 믿음, 헌신과 충성을 강조하면서, 우리도 다윗처럼 영웅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에 가족이나 공동체를 강조했던 동양은 서양과 전혀 다르게 해석합니다. 

중동에서 40년 이상 사역한 케네스 베일리(Kenneth E. Bailey)와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했던 랜돌프 리처즈(Randolph E. Richards), 그리고 20년 이상 중국에서 사역한 잭슨 우(Jackson Wu)는 서양과 다른 동양의 관점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서양적 사고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동양적으로 성경을 볼 필요가 있음을 말합니다. 

사실 구약 성경 이야기는 모두 동양 문화 속에서 발생하였으며, 동양의 언어로 기록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신학은 서양에서 발전하였고, 따라서 서양 문화로 채색되었고, 서양 언어로 표현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동서양의 생각 차이가 발생하였습니다. 


구약은 전투에서 승리하거나 패배하면, 그건 어떤 장군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신의 승리나 패배로 해석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워 이긴 후 법궤를 다곤 신당에 가져다 놓은 것은 바로 그때문입니다(삼상5:2). 

그들이 믿는 다곤 신이 여호와를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개인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들의 신에게 영광을 돌렸으며, 그 신을 믿는 공동체의 승리로 해석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긴 것 또한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블레셋 신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뜻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 싸우러 나가면서 하는 말을 살펴보면, 그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골리앗이 모욕하는 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여호와의 이름이고, 둘째는 이스라엘 군대(공동체)의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물매돌을 던지는 능력이 뛰어나서 싸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가 양을 치는 동안, 물매로 사자와 곰을 물리친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양을 칠 때 일입니다. 

칼과 창과 방패로 무장한 군인들의 싸움이 아닙니다. 

다윗의 형들이나 사울 왕이 다윗의 용맹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그가 일대일 전투의 심각성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군대 체계는 단순했습니다. 

근접하여 칼과 창으로 싸우는 보병과, 말이나 마차를 타고 싸우는 기병이나, 멀리서 물매를 사용하는 투석병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투석병에 해당합니다. 

블레셋이나 골리앗이 투석병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이 세 종류의 병사 중에 가장 약한 병사가 바로 투석병입니다. 

멀리서 돌을 던질 때는 강한 것 같지만, 근접하여 싸울 때는 힘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더우기 투석병이 돌을 던질 자세를 취하면, 병사는 자신의 방패 뒤에 숨으면 그만입니다. 

투석 병사가 돌을 다 던지면, 그는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골리앗도 방패가 있었습니다(삼상17:7). 


다윗이 물매를 들고 나올 때, 사람들은 이 싸움은 보나마나 골리앗이 이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다윗이 물매돌 다섯 개를 잡았을 때,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이 전투는 금방 끝나겠네.”

물매돌이 100개가 있어도 방패를 든 군사를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다윗이 정확하게 물매를 던질 수 있겠지만, 방패 뒤에 숨은 골리앗을 맞출 가능성은 없습니다. 

물론 바보처럼 방패도 안들고 뚜벅뚜벅 걸어나온다면,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방패까지 무장한 골리앗이 그럴 리는 없습니다. 

다만 골리앗이 방패 뒤에 숨었다가, 다윗이 돌을 던지는지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드는 그 짧은 순간을 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골리앗이 언제 고개를 내밀지, 그리고 그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내밀지 왼쪽으로 내밀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길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기적이 필요합니다. 

다윗의 능력이나 용맹함으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던진 물매돌이 방패 뒤에서 고개를 내미는 골리앗의 이마를 정확히 맞추었습니다. 

그건 다윗의 실력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골리앗을 이긴 것입니다. 


다윗이 비록 자신의 물매 실력을 사울 왕에게 자랑하였지만, 골리앗 앞에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승패가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았으며,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자신을 보호하여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다윗은 확실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셔서 승리를 주셨구나. 

이 승리와 영광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로다.”


그런데도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다윗을 칭송합니다. 

다윗의 군인다운 용맹함, 하나님을 향한 확실한 믿음, 평소 곰과 사자와 맞서 싸우며 익힌 돌 던지는 실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다윗처럼 용기와 믿음과 실력을 갖추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이 가로채는 행위입니다. 

이스라엘 여성들이 다윗 개인을 칭송하면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개인에게 돌릴 때 사탄은 활동합니다. 

개인주의는 시기와 질투, 싸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 안에서 개인의 성공과 승리를 가르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설령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용사라 할지라도 그들을 높여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돌린다고 말하지만, 사실 사람에게 영광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지렁이 같다 하였고, 사도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그 인간을 회복시키고 사용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영광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물론 다윗의 돌 던지는 실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다윗의 믿음이나 용기가 뛰어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승리는 다윗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성공과 승리는 하나님이 주신 복이지, 그것을 나의 것인양 자랑하면, 하나님을 욕보이는 행위입니다. 


블레셋의 골리앗이 이스라엘에 싸움을 걸어올 때 다윗이 용감하게 나간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가 평소 나서기를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무엘의 기름부음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개인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그를공동체의 대표로 삼고, 공동체의 명예를 지키게 함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단순히 왕의 권세를 부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가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이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대표입니다. 

그가 골리앗과 맞서 싸울 때 외쳤던 말에서 그의 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공동체)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그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분명히 의식했습니다. 

사실 사울도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대표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역할을 회피했습니다(Radnolph, p.197-198).

그때 다윗이 나섰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그를 말리려고 하였지만, 다윗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 공동체의 대표라는 자의식을 가졌음이 분명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가 모욕당하는 것을 동등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싸웠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개인 구원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도 신앙 공동체의 명예를 지키는 문제는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잭슨 우는 칭의 개념의 사회적인 측면과 공동체적인 측면을 설명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저 출생과 민족성만으로 구원이 보장된다고 생각했다는 말이 아니다.  ‘내부자’라도 이스라엘 구성원의 의무, 즉 율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외부자’로 여겼다. 추정컨대, 그러한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드러내며,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충정과 집단에 대한 충실성이 합쳐진다. 로마서 4장은 칭의의 사회적이고 구원적인 측면들을 예시해준다.”(Jackson, pp.182-3)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회중에 들어가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유대 혈통을 가지거나, 유대인과 결혼하거나, 입양되거나, 피난민으로 편입하는 방법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은 외적이고 형식적인 방법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누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명예를 지키느냐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육신의 할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길 때는 예루살렘 성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다 파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받은 사람입니다. 

일부 신학자는 그것을 개인의 사건으로 제한하여 해석합니다. 

개인의 신앙고백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 즉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라는 몸의 독립된 지체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몸,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명예를 부여받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비록 개인으로 존재할지라도, 그는 개인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대표이며, 그 공동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개인과 개인의 일대일 싸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의 명예를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 공동체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마치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떠는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세상이 신앙공동체가 믿는 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나서서 싸우려하지 않고 모두 뒤에서 숨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고, 그 하나님을 믿는 신앙공동체의 명예도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제 개인의 구원이나 성공이나 평안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와 신앙 공동체의 명예를 위해서 나서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때입니다. 

실력이나 능력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마음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먼 옛날 과거의 싸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실의 우리 앞에 벌어지는 싸움 이야기입니다. 


Bailey E. Kenneth, Jesus Through Middle Eastern Eyes Cultural Studies in the Gospel(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박규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6.

Jackson Wu, Reading Romans with Eastern Eyes(동양의 눈으로 읽는 로마서), 박장훈 옮김, IVP, 2022.

Radnolph Richards & Richard James, Misreading Scripture with Individualist Eyes(개인주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윤상필 옮김,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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