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의 지속적 회심
선교사는 회심해야 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주제입니다. 선교사는 이미 회심했는데 왜 또 회심해야 할까요? 미국 애즈베리 신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미국 선교학 저널의 발행인인 Darrell L. Whiteman은 사도행전 10장을 근거로 선교사의 지속적 회심을 주장합니다. 그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이런 주장을 하는지 살펴봅시다.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일부 지역 등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습니다. 비록 서구는 탈 기독교적이고 세속화되지만, 남반구를 중심으로 기독교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기독교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었을까요? 로마 제국의 변방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로 시작한 기독교가 어떻게 세계적인 보편적 종교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건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독특한 태도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방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처음에는 꺼렸습니다. 욥바에서 그리고 고넬료 가정에서 신비한 경험을 한 후에야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고 하지 말라”(행10:28)
이때 비로소 베드로는 선교사로서의 회심을 경험합니다. 물론 그 전에 그는 예수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로 준비된 것은 아닙니다. 선교사는 선교사의 회심이 따로 필요합니다.
선교에서 회심이라는 주제는 중요합니다. 1792년 윌리엄 캐리는 이교도들의 회심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때로부터 100년 넘게 선교학계는 불신자들을 이교도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에는 미전도 종족이란 말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이교도이든 미전도 종족이든 그들의 회심은 선교사가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선교사들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선교한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선교사의 회심이 이때 필요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자기중심적인 존재이며, 자신을, 자기 민족을, 자기 교회를, 자기 교파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문화권이 사람들보다 자신의 문화권의 사고방식, 지식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와 자기 민족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선교의 큰 장애물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온 베드로가 바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이라는 유대 문화 전통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교육받았고, 정결한 삶을 위하여 음식도 가려 먹었고, 사람도 가려 만났습니다. 이방인과 교제하거나, 함께 잠을 자거나, 식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무것이나 먹는 개와 같은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가 비록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복음의 삶을 산다고 해서 선교사의 마음가짐을 갖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가 선교사로 서기 위하여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그를 깨우치고 교육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먹지 못할 음식을 먹으라고 요구하는 환상을 통해 가르쳤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고넬료가 보낸 이방 사람들을 만날 때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은 베드로에게 명령합니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행10:20)
그는 이방 사람들을 집안으로 들였고, 그들과 교제했으며 함께 잠을 잤습니다(행10:23). 그는 유대인으로서 파격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하나씩 깨트려 나가십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갔을 때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방인 고넬료 집에는 이방인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의 친구, 이웃, 친척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때서야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여러분을 포함하여) 어떤 사람(이방인)도 의식적으로 부정하거나 더럽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행10:28 사역)
그가 복음을 증거하자, 성령님은 다시 한번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행10:44-45)
베드로의 편견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는 나중에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보수 유대인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숨기기 위해 도망쳤다가 바울에게 크게 야단 맞았습니다(갈2:11-14). 그러므로 선교사는 편견을 깨트리기 위하여 지속해서 회심해야 합니다. “Dakota: A Spiritual Geography”를 쓴 캐슬린 노리스(Kathleen Norris)는 말합니다.
“회심은 평생의 과정이지만, 우리가 마지막까지 듣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는 급격한 변화, 단 한 번으로 완전히 변화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회심은 본질의 변화보다는 관점의 변화입니다.”
회심은 자신의 방향을 바꾸고, 더 크고 의미 있는 것에 주의를 돌리고, 새로운 관점으로 삶을 재조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편견에 사로잡혔는지를 깨닫고, 바른 자기 인식과 진정성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선교사는 특히 문화적 편견, 인종적 편견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적 회심을 문화적 회심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교지에 가서 우리의 생활 방식, 가치관, 세계관, 우리의 예배 전통, 우리의 교회 운영 방식을 가르치고 강요하는 것은 문화적 회심이지 영적 회심은 아닙니다. 영적 회심은 복음으로만 가능하며,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초대교회가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갈 때 가장 먼저 스스로 문화적 편견을 깨트리고(회심하고) 타 문화권에 나갔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런 역사는 언제나 일어납니다. 타 문화권뿐만 아니라 같은 문화권 안에서도 세대 간의 갈등, 지역 간의 갈등, 계파 간의 갈등과 편견은 여전히 복음을 가로막는 장벽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번째 회심이 필요합니다.
Darrell L. Whiteman, The conversion of a missionary: A missiological study of Acts 10, MissiologyVolume 51, Issue 1, January 2023, Pages 19-30
https://youtu.be/140w4WRdywE?si=IWQfZ4bfhL1GqAF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