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의 야심작 '정이'. 한두달전부터 열심히 홍보하는 걸 보며 기대감이 커졌다. 미래시대, SF물을 좋아하는 나는 공개일을 손꼽아가며 기다렸다. 시리즈가 아닌 1시간30분짜리 단편 영화. 뻔하지만 볼만하다. 아쉽지만 나름 임팩트는 있다. 클리쉐가 심하지만 그래도 생각해볼만한(다시금) 화두를 던진다.
#스토리
기후변화로 지구는 폐허가 됐다. 인류는 새 터전 '쉘터'를 만들어 이전한다. 쉘터에서도 내전이 일어나 인류는 다시 위기에 빠진다. 전쟁영웅 '윤정이(김현주 배우)'가 탄생한다. 윤정이는 식물인간이 되고 딸을 위해 상업용 복제인간이 된다.
35년이 흐르고, 정이의 딸 윤서현(故 강수연 배우)은 '정이 프로젝트' 팀장이 된다. 수많은 복제 정이가 만들어진다. 수많은 탈출 시뮬레이션에 정이들을 투입했지만 성과가 없다.
'C 타입' 복제인간 정이는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딸은 정이의 뇌가 '엄마'의 뇌라는 걸 깨닫고 정이를 구한다. '엄마와 딸'은 함께 실험실을 탈출한다.
#내 뇌를 복제한 AI는 나일까
불로장생은 인류의 꿈이다. 진시황은 죽지 않는 약을 찾기 위해 세계를 누볐다. 여러 SF 영화들은 불로장생이 가능한 상상을 영상으로 연출해낸다. 복제인간에 뇌를 옮긴다는 클리쉐는 이제 대중들에게 익숙하다.
아바타 2편, 물의길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나온다. '악역' 쿼리치 대령과 군인들은 전쟁중 목숨을 잃지만 그들의 '뇌 데이터'는 복제돼 새 몸인 아바타에 이식된다.
'본체'의 생전 기억을 대부분 간직한 채 새 몸에서 살게 되는 그 생물을 '본체'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내 뇌를 복제한 AI는 나일까.
정이는 윤서현의 '엄마'다. 뇌를 복제한 기계이지만 인간의 본질인 '모성애'까지 복제됐다. 윤서현이 갈등하는 지점이다. 전투용 AI와 엄마의 경계에서 혼란에 빠진다.
복사본이 원본과 아무리 같다고 한들 복사본은 복사본이다. 그 유명한 모나리자 그림의 사본이 전세계에 셀수없이 많지만,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찐 모나리자'와는 비교할 수 없다.
식물인간이 된 원래 '정이'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 정이의 뇌, 생각을 가진 AI가 있다고 해도 그건 정이가 아니다. 새롭게 고통받는 또하나의 인격이 생겼을 뿐이다.
하지만 정이를 대하는 '딸' 윤서현 입장에선 다르다. 복사된 모나리자를 보는 사람이나, 복제인간을 접하는 지인들의 입장에서 '원본'을 보는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실용성'은 충분히 있다. 윤서현이 흔들린 이유다.
뇌 데이터를 복제해 다른 몸으로 옮기는건 '나'를 위한 선택은 확실히 아니다.
#회장
"나같이 돈많은 사람들이 제일 관심있어하는 게 뇌복제 기술이다. 가능성이 생겼을때 이제 영생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더라".
크로노이드사 회장은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늙고 병들어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노화와 병, 생명 앞에서는 권력이나 돈도 큰 의미가 없어진다.
회장이 자신을 복제해 만든게 연구소장 '김상훈'이다. 회장은 자신을 복제한 크로노이드를 만들었지만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날 수 없었다. AI가 본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다.
#김상훈
회장은 인간성을 상실했고, 기계 김상훈은 본인을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김상훈(류경수) 연구소장은 회장의 젊은 모습, 페르소나다. 목표와 성과 앞에서 물불 가리지 않는다. 쏘시오패스적 기질이 있다. 회장의 뇌를 복제했기에 똑같은 성격을 가졌다.
회장은 김상훈을 수족처럼 부린다. 철저히 기계로 대한다. 쓰임이 다하면 폐기처분할 대상이지, 본인의 분신까지는 될 수 없다.
김상훈의 '본인만 재밌는 유머'는 회장의 특징이었다. 김 소장의 유머는 본인만 웃는다.
인간(휴먼)과 기계의 중간지점 쯤에 있는 복제인간 김상훈, 인간성을 상실하고 돈과 목표에만 집중한 회장. '재미없는 유머'는 '인간성을 잃은 인간'과 '인간의 모습을 닮은 기계'를 상징하는 역설적 표현이다.
#윤서현
고 강수연 배우가 연기한 정이의 딸 윤서현. 35년 전 엄마의 모습을 한 AI 정이보다 늙었다. 시종일관 어두운 표정으로 웃는 모습이 없다. 눈시울이 항상 젖어있다.
폐기처분하기 전 정이의 뇌에서 미확인영역 활동이 증가한다. 죽음을 앞둔 딸에 대한 생각, 모성애였다.
엄마의 뇌를 그대로 복제한 AI는 35년이 지나도 여전히 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 포인트가 영화의 전환점이다. 윤서현은 오열하며 마음을 고쳐먹는다.
모성애는 뇌로 조작할 수 없다. 뇌에서 그 영역을 지운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물리적 법칙을 뛰어넘은 '영혼'과도 같다.
이성과 과학을 뛰어넘는다. 머리로가 아닌 마음으로 하는 게 모성애, 사랑이다. 영화는 이런 메시지를 던진다.
#정이
AI가 되기 전 정이는 딸의 치료비를 위해 전쟁에 뛰어든다. 전쟁에서의 맹활약으로 영웅이 된다. 하지만 작전에 실패해 식물인간이 된다. 결국 인격적 대우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C 타입 AI'로 그의 기억이 보존된다.
성적 노리개까지 될 수 있는 C 타입으로라도 기억이 세상에 남아 있는게 좋을까, 아니면 자연의 섭리를 따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까. 또 하나의 생각해볼 거리다.
#연상호 감독
연상호 감독의 지옥, 반도, 부산행 모두 재밌게 봤다. 보는 중에 '뭐지?' 싶은 면이 있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라는 게 공통점이다.
이번 영화 정이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복제인간과 윤리적 갈등, 신파요소까지 어디서 본듯한 스토리이지만 임팩트는 확실하다. 공허한 감상을 넘어 마음의 여운을 줄 수 있다면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