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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리 Apr 02. 2020

선배, 저 이제 그만 나오래요.

너를 처음 만나던 날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날은 내가 막내를 벗어난 날이자 나름 선배 노릇해보겠다며 기분 좋게 긴장하던 날이다. 하얀 피부에 살짝 통통했던 너는 취준이 길어져 마음고생을 했다며, 스트레스를 받으면 살이 찌는 탓에 지금이 몸무게 최고치라며 털털하게 말했다. 목소리는 주변 지인 중 2번째로 하이톤이었고 그래서인지 언제나 명랑함을 풍기고 다녔다. 너는 가볍게 말했지만 그 안에 담긴 취준의 공백과 그늘을 난 느낄 수 있었다.


우린 둘 다 20대 후반에 첫 직장을 이곳에서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경력으로도 나이로도 1년이 채 안되던 격차는 회사 문만 나서면 잊혀졌다. 중간 직급 없는 이 작디작은 팀에서 우리는 점점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딱 1년간 우리는 울고 웃으며 성장했다.


이후 우리 팀은 해체됐고 너와 나는 다른 노선을 걷게 되었다. 나는 조금 삭막한 팀으로, 너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덜한 팀으로 갔다. 밤낮없이 일하며 눈물 콧물을 쏟던 나에 비해 비슷한 생활을 유지하던 너를 보며 시샘이 조금이라도 안 났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다시 또 1년이 지났다.

나는 조금 어두워졌고, 너는 여전히 밝았다.


한국에서 코로나19로 경제가 위기라고 우려가 꿈틀댈 때, 나는 체감하지 못했다. 회사의 테두리가 나름 튼튼하다고 믿었고, 수출로 돈을 벌어먹으니 우리나라가 안정을 찾으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 얄팍한 예상은 쉽게 빗나갔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하자 주 바이어가 미국인 우리 회사는 커다란 위기를 맞이했다. 내가 조금씩 불안해하기 시작했을 때 회사는 벌써 구조조정에 대한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을 것이다.


너의 팀에서 감원하라는 공지가 내려왔을 때 우리는 조금 긴장했다. 그러나 고작 2년밖에 안된 너를 자를 거라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너의 명랑한 말투가 묻어나는 문자에 나는 정말 놀랐다.


“선배, 저 이번에 나가래요...ㅋㅋ”


이것은 우리가 사회인으로서 맞이한 첫 번째 경제위기가 분명한 것 같다. 나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회사의 결정에 대한 분노, 실직에 관한 공포, 미래에 대한 막막함... 그리고 나보다 네가 똑같이, 그러나 더 크게 느꼈을 것에 대한 안타까움. 그런데 무엇보다 난 너에 대한 미안함이 물밀듯이 눈밑을 차고 올라왔다.


없던 여유만큼이나 마음의 크기도 작았을 때 힘든 회사 생활에 대한 불만이 나도 모르게 너에 대한 질투로 번졌다. 그게 아닌 걸 알면서도 점심시간에 만나 밥이라도 한 끼 하면 느껴지는 업무의 온도 차이에 표정관리가 안될 때도 있었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잡던 점심 약속이 자연스레 끊긴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난 그 문자를 받자마자 이 마음이 너한테 들킨 것 마냥 부끄럽고 미안했다. 이번 결정은 그 팀에서 너의 입지가 얼마나 미약했는지, 그래서 속으로는 맘고생을 얼마나 했는지를 가늠케 했다. 내가 속상해 하자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던 전화기 넘어 들리는 하이톤 목소리가 너무도 그리울 것이라는 생각에 눈이 빨개졌다.


내가 지금의 팀으로 온 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듯이 네가 지금 회사를 떠나는 것도 나쁜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너에겐 힘든 일이 생겨도 긍정 에너지로 덮어버리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퇴사일을 앞두고 만나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조잘거리며, 본인은 얼마나 억울한지에 대해 털어놓는 내내 그래도 너의 모습은 어쩐지 밝고 유쾌했다. 너는 읽지 못할 편지겠지만 나는 여기에 이렇게 미안하다고 적는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힘을 실어 너를 응원한다고 적는다.

내 부끄러움을 덜기 위해서. 내 미안함을 덜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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