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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리 Ella Oct 07. 2022

UX 라이터의 퇴사 회고록 (하)

발품으로 이뤄낸 커피챗과 면접, 새 조직에 합류한 계기와 최근 인터뷰까지

얼마 전 남긴 퇴사 회고록에 주변에서는 엇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런 것도 회고하냐, 성실하다- 같은 말들. 부끄러웠다. 평소 회사 프로젝트 외에는 별다른 회고도 하지 않고, 성실보단 게으름이 예사인 내겐 분에 넘치는 말이었다. 어떤 결과물을 낼 땐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게으른 완벽주의자' 성향임에도 퇴사와 이직 과정을 기록한 덴 이유가 있다. 직관적 도전이 앞섰던 지난날들과는 달리 경험에서 비롯한 주관으로 커리어를 점검하며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다음 단계를 밟아나갔기에, 그 소중한 경험이 휘발되지 않도록 흔적을 남겨두고 싶었다.


(상) 편에서는 1) 내재적 동기를 되짚고, 2) 지난 커리어를 점검하고, 3) 넥스트 스텝을 어떻게 설정했는지 이야기했다. 이번 편에서는 여러 기업과의 면접으로부터 얻은 나만의 판단 기준, 새로운 기회를 잡게 된 배경과 함께 최근 회사 팀 블로그에 실린 개인 인터뷰 내용을 담았다.





Chapter 4. 면접 또 면접

인터뷰이에게도 지표는 있다


궁금했던 기업을 추린 후 UX/BX 헤드의 컨택포인트를 알아내 역 콜드 메일을 보냈다. 기업에 UX 라이터가 필요한 이유를 가볍게 설득하고서는 직접 만나 내 역할을 셀링했다. 덕분에 훌륭한 리더들을 만나 커피챗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첫 인터뷰에서는 괜한 근자감으로 '이제 인터뷰는 뚝딱이지' 하며 아무런 준비 없이 들어갔다가 잔뜩 긴장한 나머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고 싶은 말은 왜 무대가 끝난 뒤에야 생각나는 걸까. 시니어로서 응당 경험했을 법한 질문에서 흐릿한 기억으로 얼버무린 탓에, 순간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더는 내 기억력을 믿지 않기로 했다. 준비도 실력이다. 고배를 마시고 나니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후에도 도전은 이어졌고, 미국 여행 중에도 그나마 조용한 카페를 찾아 한국 시간에 맞춰 커피챗을 하기도 했다. 하물며 코로나를 앓던 상황에서도 인터뷰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그대로 강행한 적도 있다. 그땐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당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떻든 인터뷰 맷집을 쌓다 보니 점점 기업과 조직, 동료(인터뷰어)를 평가하는 나만의 기준이 세워졌다. 대부분의 인터뷰어가 타 직군이었기에 UX 라이팅에 대한 관점을 깊이 알아보긴 어려웠지만, 내 대답에 이어지는 질문과 그 깊이에서 나 역시 그들을 판단해볼 수 있었다. 역으로 질문을 던질 땐 '이 사람과 함께 일한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겠구나'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했다. 인터뷰를 거듭하면서 판단 기준은 더 디테일해졌다. 가장 큰 주안점은 '조직의 일하는 방식과 프로세스가 얼마나 고객 지향적으로 움직이느냐'였다. 이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다음 물음들이 이어졌다.


1) 조직의 목표가 체계적으로 설정되어 있는지? 기업의 비전과도 잘 얼라인 되는 목표인지?

일에 대한 내재적 동기 중 '목표'를 1순위로 여기는 만큼 내겐 중요한 대목이었다. 단기 프로젝트와 분기별 목표가 조직의 중・장기 목표에 잘 연결되어 있고, 실제로 기업의 비전에 맞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속속들이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조직장과의 대화에서 최대한 알아보고자 노력했다.

2) 내게 기대하는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그 역량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

전 직장에선 평가에 대해 면밀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예상과는 다른 평가에 속상했던 적도 있다. 그때 친한 동료가 해준 말이 크게 와닿았다. 일한 만큼 잘 평가 받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상위 리더와 집요하게 이해관계를 맞추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이 기준이 물렁할수록 이후 평가에서도 근거가 약해지고, 리더가 당신의 퍼포먼스를 원하는 방향대로 밀어주기 어렵다는 것. 스타트업보다는 규모 있는 조직에 있다면 깊이 고려해볼 만한 관점이었다.

3) 기업의 비전이 대표의 직관만으로 움직이는지?

넥스트 스텝 중 스타트업 몇 곳도 후보로 두었기에 이 부분도 간과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듣고 경험해온 바로만 일반화하자면) 대표의 직관이 크게 작용하는 기업은 대개 아이덴티티가 선명했다. 하지만 그 멋진 비전을 꿈꾸면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존버하다가 속도가 더뎌지는 경우도 더러 목격했다. 최근 IT 업계에서 화두였던 <오늘회> 사건도 내막은 모르겠지만, 표면적으로는 당장의 현실을 간과한 데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래를 향한 직관력과 현실을 대하는 민첩성, 정성적 목표에 정량적 근거 한 방울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기업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사이 재미난 기회도 생겨났다. <당근마켓>의 BX 헤드 분과 커피챗을 진행하다 강연을 제안 받아, 임직원 대상으로 UX 라이팅의 개념과 사례를 공유했다. 연이어 <멋쟁이 사자처럼>과도 연이 닿아 스타트업 예비 창업자 워크숍 '스타트업 스쿨'에서 '고객 경험 글쓰기'를 주제로 강연하며, 그들의 작업물을 피드백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전 직장에서는 회사 이름을 등에 업는 순간 리뷰 단계가 복잡해지고 제한 사항도 많아, 외부에 공유할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쉽사리 잡지 못했다. 그래서 두 차례의 강연은 더 뜻깊었고, 사소한 해방감마저 들었다. 퇴사 후에야 다음 행선지를 알아본다는 사실이 조금 막막하기도 했지만, 그 시기에 강연을 함께 준비한 덕에 좌절보단 희망의 마음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다. 이직 활동과 강연 준비를 병행하며 한 달 반을 발품 뛴 결과 최종 인터뷰를 거쳐 여러 선택지를 고민할 수 있게 됐다. 그때 별안간 새로운 기업이 눈에 들어왔다. 계기는 우연에서 시작됐다.




Chapter 5. 예정에 없던 곳

나흘 만에 선택하게 된 사연


모 기업의 3차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구직 활동으로 다소 지친 탓에 '이제 여기까지만 보고, 최종 선택지 중 고르자'는 생각뿐이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올 초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W와의 저녁 식사를 위해 근처 선릉으로 향했다. 그는 지인들과 내게 잠시 사무실에 들러 대표님과 인사를 나누자고 권유했다.

휴게 공간에 앉자마자 대표님의 회사 소개가 이어졌다. 슬립테크 슈퍼앱을 꿈꾸는 '에이슬립'. 내가 아는 수면 관련 브랜드는 '삼분의 일', '식스티세컨즈' 같은 매트리스 브랜드가 전부였지만, 에이슬립은 흔히 알던 하드웨어 중심이 아닌 AI 기반의 슬립 테크 기업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저녁을 기다리는 배꼽시계가 영락없이 울리는 바람에 대표님의 회사 소개에 제대로 집중하기 어려웠다. 집중력이 0에 다다를 때쯤 소개는 끝이 났다. 식사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W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일 대표님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가볍게 대화 나눠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에 다음 날 또다시 에이슬립을 찾았다. 이번에도 밥 생각에 여념 없던 마음을 대표는 단 10분 만에 본인에게 돌려놓았다.

이전 다른 기업과의 인터뷰에서는 ‘UX Writing 체계를 잡고, 구성원들에게 내재화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면, 에이슬립에서는 기업이 전개해나갈 일들과 회사의 성장 가능성, 내게 기대하는 일에 벅찬 설렘이 먼저 다가왔다. 좋아하는 브랜드를 만나 설렌 적은 있어도, 아직 잘 모르는 불모지 같은 영역에 설레보기는 처음이었다. 무엇보다도 대표의 마인드가 멋졌다. 직원의 가치와 성장을 진정으로 고민하며, 그에 따른 지원과 처우를 아끼지 않으려는 태도가 그의 모든 언변에 묻어났다. 누군가 합류하게 되면 처음부터 하드 랜딩으로 달리기보단, 본인의 역할이 무엇이고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지 스스로 정의하면서, 어떤 문제를 해결해나갈지 생각해보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고 싶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스타트업 환경상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경영가로서 통상 가지기 어려운 마인드기에 더 놀라웠다. 그런가 하면 대표는 회사의 실질적인 엑싯 전략을 투명하게 공유해주기도 했다. 물론 사분면으로 딱 잘라낼 순 없을지언정, 이런 전략을 도식화하는 방식 자체가 너무 흥미로웠다.

마치 AI처럼 조금은 투박해 보이는 그의 태도가(죄송합니다 David) 이해되기 시작했다. 명확하게 짚을 순 없지만, 억지스러운 꾸밈말보다는 정수로 내리꽂는 느낌적인 느낌! 더군다나 당장에 급박했던 Pain Point까지 해결됐다. '커피챗이 긍정적이었다면 인터뷰 전에 오퍼레터부터 보내겠다'는 파격적인 제안 덕에 다른 선택지를 두고 난처하게 미루는 일 없이 동등한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밀당 하나 없는 소개팅처럼 모든 과정이 빠르고 순조로웠다. 그 결과 어마한 기술력과 비즈니스 성장 가능성을 지닌 동시에 내 직무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믿어주는 에이슬립에 최종으로 합류하게 됐다.




Chapter 6. 입사 50일 후,

지금 에이슬립에서 Ella는


최근 팀 블로그에 개인 인터뷰가 실렸다. 내용이 길어 일정 부분만 가져왔다. (전문 읽기)

프로덕트 UX 라이팅과 함께 에이슬립의 라이팅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는 UX 라이터 엘라 님은 매사 꼼꼼하고 치밀했습니다. 에이슬립에서 제공하는 여러 서비스의 보이스앤톤을 설계하고자, 기업의 비전 시스템을 재정립하면서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보고 있었죠. 업무 외의 시간엔 천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음악 유튜버로서 부캐 활동에도 열심이었는데요. 엘라 님의 이야기를 지금 소개합니다!


Q. 현재 에이슬립에서 담당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A. 초반 한 달은 라이팅 시스템 설계를 위한 초석을 마련하는 데 집중했어요. ‘에이슬립이라는 기업 안에 각각 다른 성격의 브랜드가 제공된다’는 내부 관점에 얼라인하는 게 우선이었어요. 예컨대 쿠팡보다는 비바리퍼블리카나 무신사처럼 생각해야 하는 거죠. (ex. 쿠팡 - 쿠팡앱, 쿠팡이츠, 쿠팡플레이, 쿠페이.. / 비바리퍼블리카 - 토스, 타다 / 무신사 - 무신사, 29CM). 그래서 기업과 브랜드의 비전시스템 위계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를 먼저 고민하고, 아직 내재화되지 않은 개념을 주요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얼라인하며 정립해나갔어요. 보이스앤톤을 잡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거든요. 지난 기업은 모두 비전시스템이 이미 설계된 곳들이었기에, 기업의 비전과 미션을 이렇게 골똘히 생각해본 건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그다음 가장 먼저 수중 위로 드러낸 업무는 ‘슬리’ 앱의 UX 라이팅이었어요. 다만 CBT 런칭까지 일주일 남은 시점에 맞춰 디자인, 개발 공수를 들이지 않는 선에서 작업해야 했기에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신경 쓰진 못했어요. 다음 이터레이션에서는 UX 라이팅의 End-to-End를 점검하며 계속해서 다듬어나갈 예정이에요.


DTx 스쿼드에서는 UX Writing과 함께 브랜딩도 담당하고 있어요. 스타트업 안의 또 다른 스타트업처럼 꾸려진 조직이라 역할 범위도 더 넓죠. 물론 슬리 앱 스쿼드처럼 애자일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디지털치료제 특성상 서비스를 세상에 내놓기까지 호흡이 길기 때문에 앞단의 브랜딩을 더 탄탄하게 잡아나가고 있어요.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와 핵심 가치, 네이밍, 보이스앤톤 순으로요. 앱 안에서 구현될 ‘인지행동치료(CBT-I)’의 콘텐츠 워싱도 맡고 있어요. 콘텐츠 전반을 맥락에 맞게 구조화하고, 어려운 전문 용어를 쉽게 풀어 쓰며 고객 입장에서 전달하는 데 주안을 두면서요. 특히 치료제라는 목적에 맞게 톤을 정제하고 조정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Q. 에이슬립에서 이루고 싶은 나만의 미션은?

A. 다른 직군과 달리 여러 프로덕트를 넘나들며 UX 라이팅을 한다는 점이 지금으로써 가장 큰 특이사항인데요. 그만큼 각 스쿼드에서 제가 해야 할 업무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며 기업 관점에서 우선 순위를 세우는 일이 중요해요. 혼자 동시다발적으로 하는 덴 한계가 있고, 이도 저도 아니게 될 수 있으니까요.


장기적으로는 프로덕트 내 UX 라이팅을 넘어 에이슬립에 속한 여러 브랜드의 보이스앤톤을 설계하고 점검, 개선해나가면서 기업의 라이팅 시스템을 탄탄하게 만들어 나가고 싶어요. 에이슬립이 전하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 글로써 정의하고, 앱 안팎에서 일관된 목소리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기준을 세워나갈 예정이에요. 지금부터 그 기반을 열심히 닦으며, 언젠가 함께하게 될 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아직 프로덕트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초기 단계에 합류해 브랜드 비전과 전략부터 제로 투 원을 세팅하는 일은 UX 라이터로서 그 어디에서도 경험하기 힘든 소중한 기회이자 자산이다. 비약적인 성장이 기대되는 이 기업에서 '고객 경험 글쓰기'의 영역과 영향을 확장해나가며,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보는 고도화된 UX 전문가로 거듭나고자 스스로를 격려한다. 나 자신 몹시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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