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짜증이 이해되면 사라지는 짜증은 아니다.
사건은 있었지만 감정의 정확한 트리거가 인식되지 않은 상태일경우 신경계는 문제신호를 보낸다.
이 짜증은 원인을 알아차리는 순간 사라진다.
원인은 명확하고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고 구조가 바뀌지 않는 짜증은 이해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원인을 처음부터 알고 있고 문제가 지금도 존재중이고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그래서 지금도 화가 나는거야
라고 유지된다.
대부분의 짜증은 대략적인 이유는 알고 있꼬 다만 너무 익숙해서 굳이 인식하지 않고 지나간 것뿐이다.
감정은 신호이면서 에너지다.
행동을 요구하는 에너지는 상황이 바꾸기 전까지 유지된다.
변하지 않는 구조로 인한 짜증의 이해는 출발점이다. 수용한다고 종료되지는 않고 경계와 요구와 변화가 따라야 한다.
현실이 계속해서 나를 침범하면 감정은 지속된다. 현실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감정이다.
이해되기를 기다리는 감정이 아니라 계속 생성되는 감정이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판단을 멈추는 것이지 감정을 멈추는 것이 아니다.
이해하면 되는 감정인지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감정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상황을 감수하고 현실을 인정해도 이건 행동 전략의 결정이지 정서적 비용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불공정하고 부담은 혼자 지고 내가 선택했다고 해도 괜찮아진 것은 아닌 감정은 억울함 과 소진과 애도의 감정이 섞여있다.
짜증이라는 말하나로 표현되지만 실제로는 무언가를 잃었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나 신체 반응이다.
우리가 짜증난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상실된 어떤 것을 붙들고 있는 상태이다.
상실의 대상은 물체뿐만이 아니라 가능성 기대 관계의 질 내 마음의 평온 모두 포함된다.
상실반응은 자연스러운 생존신호이다.
상실을 인정하면 짜증과 긴장감이 서서히 흘러나갈 수 있다. 억지로 없애려 하면 체내에 남는다.
짜증은 단순히 화가 아니라 내가 기대했던 관계 균형 평온을 잃었다는 상실반응이다.
짜증스러운 감정은 수용이 덜 돼서가 아니고 미성숙해서도 아니고 집착해서도 아니다.
현실이 계속 같은 요구를 하고 몸과 정서가 계속 그 비용을 지불하고 있기에 이해하고 인정하고 선택했어
라고 해도 감정은 매일 새롭게 계산된다.
이 짜증은 관리하거나 존중해야 하는 신호도 아니고 살아가며 같이 존재하는 잔여비용이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다 짜증이라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삶을 다루는 방식의 레벨이
바뀌는 지점이다.
내가 선택한 삶이라고 힘든 감정을 혼자 견뎌야 할 이유는 없다.
그 힘듦을 말해질 수 있는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말로든 글로든 기록으로든.
짜증이라는 말은 많은 감정을 덮는다. 그 말 아래에는 억울함 피로 애도 (그런 삶을 살지 못한 나에 대한)
분노 고립감이 있다.
짜증이 아니라 소진이고 분노가 아니라 애도이다.
사람은 혼자 감당해서 무너지는 게 아니라 아무도 그걸 보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 무너진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은 이 삶을 내가 살고 있다는 걸 누군가는 알고 있다는 사실.
짜증은 정체 상태다 움직이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이다.
그래서 변환은 긍정이 아니라 방향이 생길 때 일어난다 .
내가 원래 원했던 삶은 이게 아니었구나 이걸 인정하는 순간 짜증은 슬픔으로 바뀌며 애도할 수 있게 된다.
슬픔은 울 수 있게 하고 쉬게 하고 느리게 만든다. 몸을 덜 갉아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