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ola Holmes, 2020
목적하는 바에 부합하는 깔끔한 스토리텔링이 돋보인다. 원작에서 주인공의 성별만 바꿔 리메이크한다거나, 쓸데없는 인물을 끼워 넣고 억지 플롯을 할애하는 영화들에 지쳤다면, '에놀라 홈즈'가 나쁘지 않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에놀라 홈즈'는 선거법 개정 등 변화의 물결이 휘몰아치던 영국의 근현대를 배경으로, 여성들이 참정권을 비롯한 자신들의 삶과 권리를 쟁취해나가던 시절의 초기 페미니즘을 근간으로 삼았다. 굳이 에둘러 가지 않고 직접적으로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셜록 홈즈' 세계관을 빌려오긴 했지만 '에놀라 홈즈'는 단순히 '여자 셜록'을 보여주는 데 급급하기보다는, 설정에 부합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제시한다.
이는 '에놀라 홈즈'의 원작이 훌륭한 파스티슈(Pastiche)인 덕분이다. 낸시 스프링어의 원작 소설은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속 세계관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면서, 19세기 초 페미니스트들의 모습을 투영한 주인공을 내세워 새로운 서사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또 주인공에게 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를 덧입히면서 청소년 문학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아 성장의 미덕도 갖췄다. 영화 '에놀라 홈즈'는 이러한 원작의 장점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데 성공했다.
에놀라는 굳이 셜록의 뒤를 밟지 않는다. 그녀는 셜록을 빼닮은 능력을 지녔지만 지향하는 바는 크게 다르다. 굳이 셜록의 이야기를 여성형으로 번안하지 않아도 될 만큼 고유의 매력을 가진 캐릭터가 됐다. 페미니즘을 다루는 이야기가 남성형 이야기에 의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셜록의 후광에서 벗어나려는 에놀라 홈즈의 노력은 그 자체로도 메타적으로 페미니즘 서사가 된다. 여러모로 목적하는 바에 정확히 부합한다는 얘기다.
주인공이 싸우는 대상이 비단 남성에 국한되지 않고 남성적 사회를 겨냥한다는 점도 '에놀라 홈즈'의 미덕 중 하나다. 에놀라는 그녀를 억압하는 남성 안타고니스트와의 대결에서 승리해 영웅의 지위에 오르는 게 아니다. 그녀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기존의 가치를 고수하려는 이들과 투쟁한다. 물론 아주 가볍고 엉뚱한 방식으로 말이다. 이를 통해 '에놀라 홈즈'는 정치적으로도 더 건전하고 성장 서사로서도 더 강력한 이야기가 됐다.
그런 점에서 '에놀라 홈즈'는 '기묘한 이야기(Strange Things)'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밀리 바비 브라운이 탐내고도 남았을 만한 이야기 같다. (밀리 바비 브라운은 원작을 읽고 영화로 만들고 싶어 제작자에게 먼저 제안을 했고 제작을 비롯, 캐스팅과 대본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가 카메라 너머 시청자들을 바라보며 말을 건넬 때마다 캐릭터와 배우 자신의 매력이 동시에 배가된다. 사실 방백이 다소 과하기도 하고 낯설긴 하지만 자칫 밋밋할 수 있었던 흐름에 활기를 불어넣는 측면도 있다. 또, 이야기의 흐름이 늘어질 때마다 주인공에 대한 집중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자아 발견' 스토리에 있어 효과적인 설정이기도 하다.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시청자들에게 분명 정확하게 적중할 것이다.
다만 '에놀라 홈즈'는 '홈즈'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추리극으로서는 함량 미달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하이틴물로서의 매력과 페미니즘을 녹여낸 서사 사이에서 비교적 훌륭하게 줄타기를 한 편이지만, 분명히 추리극으로서는 지루한 부분이 많다. 에놀라가 풀어내는 건 빅토리아 시대 여성으로서 자신 앞에 닥친 시대적 환경이지, 복잡한 사건의 실타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에놀라 홈즈'는 셜록으로부터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덕분에, 이름만 남은 셈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헨리 카빌의 셜록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 같은 '홈즈'지만 에놀라는 셜록과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고, '에놀라 홈즈'는 아직 스스로를 탐정이라고 칭하기 한참 이르다. 이번만큼은 확고한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인물과 세계관을 소개하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후속작을 준비하고 있다면 에놀라가 풀어내야 할 사건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겠다.
결론적으로, 밝고 활기차며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빅토리아 시대 소녀의 자아 찾기 활극에 호기심이 생긴다면 추천.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빅토리아 시대 여성문학을 받아들이고 비틀어 현대화한 작품의 매력을 십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