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목욕_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자유탕>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목욕탕이 있어."
어느 날 뜬금없이 친구에게 날아든 제보였다. 새로 이사 간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던 중 보기 드물게 커다란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건물을 봤다는 거였다. 마침 멈춰 선 버스 덕분에 간판을 읽을 수 있었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듯한 목욕탕 로고와 함께 '자유탕'이라고 적혀있었다고 했다. 이윽고 앞문이 열리더니 목욕 바구니를 든 한 무리의 할머니들이 버스에 우르르 탔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찰나라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쉽다면서, 하지만 이 자유의 여신상은 본 것 중 가장 특이하다고 하며 언제 한 번 놀러 오라고 했다.
당장 인터넷 창을 열고 '진해 자유탕'을 검색했다. 네이버 지도에 위치가 등록되어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하긴 자유의 여신상이 목욕탕에 있건 말건 목욕탕을 이렇게 궁금해하는 사람이 잘 없으니까, 직접 가볼 수밖에 없었다. 친구와 함께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목욕탕으로 향했다.
처음 마주 한 자유탕의 모습은 상상한 것보다 더 이상하고 재미있었다. 수직으로, 수평으로 보아도 건물의 가장 가운데에 커다랗게 위용을 뽐내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제법 본격적으로 새겨져 있었다. 약간 비례가 맞지 않는 듯 어설픈 느낌이 있었지만 의외로 그럴듯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처음부터 자유의 여신상을 새기겠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아주 처음부터 작정하고 '자유탕'이라는 이름을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대인 5,000원. 요즘 목욕탕 요금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었다. 친구와 둘이 왔으니 자신 있게 만원 짜리 한 장을 내밀고 "두 명이요."라고 얘기했다. 무료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아저씨는 웬 젊은이들인가 싶었는지 흘끗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뭔가를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자유탕의 비밀을 알고 싶었지만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일단 목욕부터 하자.
특이하고 커다란 외관에 비해 실내는 아담하고 평범했다. 딱히 잠금 시설 없는 신발장을 지나 커튼을 걷으면 바로 탈의실. 짐을 보관하는 로커와 평상, 큰 거울이 있는 화장대가 전부인 심플한 구조였다. 90년대 말이나 2000년대 초반의 분위기가 분위기와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에 묘하게 편한 기분이었다.
일요일 아침 여탕 안은 할머니들로 가득했다. 어두컴컴한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할머니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쏴댔다. 이 시골 목욕탕에 웬 젊은이들이지 하는 표정이었다.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하며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씻었다. 탕은 온탕, 열탕, 냉탕의 심플한 세 가지. 작은 사우나와 샤워기가 딸린 편안한 좌석에 샤워 부스도 갖춰져 있었다. 추측컨대 한 번 정도는 리모델링을 거친 듯했다.
탕은 모두 계단식으로, 그러니까 바닥 아래로 탕을 만들지 않고 바닥에서 위쪽으로 융기하듯 지어놓은 모양이었다. 이런 계단식 탕은 오르내리는 게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탕에 들어갔을 때 시야가 높기 때문에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삼삼오오 모여 탕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탕 안으로 들어갔다. 열탕의 온도가 그리 뜨겁지 않아 따뜻한 담요를 두른 듯 포근해졌다. 물도 깨끗한 편이었다. 만족스러운 눈길로 사방을 휘휘 둘러보다 할머니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오데서 왔노?"
"아 요기 앞이 친구 집이라서 놀러 온 김에 친구랑 같이 목욕 왔어요. 집은 이 동네 아니에요."
"그래 오데?"
"아 김해요."
"아이고, 멀리서도 왔다. 느그 둘은 친구가?"
"네. 십오 년 됐어요."
"아이고, 둘이 보는데 어찌 그래 내가 좋드노. 나 들면 친구가 최고다. 딴 거 필요 없다. 하나만 있어도 좋다. 그것도 안쉽제. 느그 둘은 꼭 늙어 죽을 때까지 친구해래이."
"네 꼭 그럴게요."
할머니의 뜬금없는 덕담에 나도 모르게 꼭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친구는 대답이 없었지만. 멋쩍게 웃고 났더니 또 말을 걸어오신다.
"나가 몇 살이고? 결혼은 했나?"
"아니요, 안 했는데요."
"그래 몇 살이고?"
"(멋쩍게 웃으며) 서른인데요."
"아 너무 어려가꼬 안 되겠네. 우리 동네 총각이 나이가 너무 많다. 아니 참 착해 봬서 함 물어봤다."
"저는 계속 놀 건데요. 헤헤헤"
"그래 마 많이 놀아라. 세상 을매나 좋노."
목욕탕에 다니면 이런 할머니들이 많아서 나도 넉살이 는다. 너스레를 떨며 곤란한 질문을 피하고는 탕에서 나와 열심히 때를 벗기고, 개운한 몸으로 바깥으로 나섰다. 만족스러웠다.
바깥으로 나서며 적잖이 흥분되었다. 드디어 알 수 있을 테니까. 자유탕의 비밀을! 놀랍게도 두 시간 전과 똑같은 자세와 표정으로 TV를 응시하고 있는 프런트의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 이 목욕탕은 얼마나 오래됐어요?"
"어..... 아마 90년대 초반에 지은 걸로 아는데. 92년인가."
"그럼 그때부터 쭉 계셨어요?"
"아이라, 내 온 지 20년쯤 됐다. 그 전에는 다른 사람이 했고."
"아 그러면 여기 이름이랑 건물은 사장님이 지으신 게 아니네요?"
"그렇지."
"그럼 여기 왜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지는 혹시 아세요?"
"아니 그건 모르는데. 왜요?"
"지나가다 봤는데 엄청 눈에 띄어서 와봤거든요. 궁금해서요."
"글쎄 나도 그걸 잘 몰라서...."
끝내 자유탕의 비밀은 알 수 없었다. 사장님이 모른다고 하시니 누구에게 물어볼 수 있을까. 아쉽고 막막한 기분으로 돌아서야 했다. 건너편 주차장에서 다시 한번 자유의 여신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목욕탕은 여기 하나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뉴욕에도 없을 거다. 특별한 만큼 이유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시시껄렁하게도 자유탕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니 자유의 여신상이 필요했다는, 그런 단순한 이유라도 있었다면. 기록되지 않는 수많은 목욕탕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까.
어쨌거나 좋은 목욕이었습니다.
자유탕 ㅣ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중로 74
오전 5:00 ~ 오후 8:00. 매주 월요일 휴무 ㅣ 성인 5,000원, 소인 3,000원 ㅣ 수건 등 비품 일체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