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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주말 목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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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천고래 Jan 08. 2019

뚝심 있는 물맛의 이유

주말 목욕_부산광역시 동래구 <만수탕>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내내 밖으로 쏘다니기 바빴지, 가까이에 온천이 있는지 살펴볼 생각은 않았다. 참을 수 없이 온천에 몸을 담그고 싶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 되겠다, 어디든 가서 담그자. 이왕이면 온천으로, 가능하다면 숨어있는 보석 같은 온천을 찾아보자. 간절한 마음으로 초록창이 알려주는 사이트들을 들락날락하며 드디어 원하는 곳을 찾았다. 집에서 편도 한 시간 거리에 그토록 찾던 물맛 좋은 온천이 있다는 소식에 자리에서 일어나 목욕 가방을 들었다. 갈급한 마음을 동력 삼아 충동적으로 길을 나섰다.


처음 나타나는 '만수여관 온천' 간판,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만수탕' 간판.
이번에는 '만수대중탕'이다. 


도착지는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위치한 동래 온천지구였다. 웹툰 <목욕의 신>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아주아주 크고 멋진 탕이 있는 허심청을 비롯해 여러 온천이 성업 중인 동네다. 유동 인구 많은 도심 속 온천이라 길은 반듯하게 닦인 지 오래고, 어지간히 이름 난 온천들은 몇 층짜리 단독 건물에 좋은 시설을 갖추고 가족탕이며 대중탕을 운영한다. 나는 그 시설들을 무심히 지나쳐 작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시장이 시작되는 좁은 골목에서도 한번 더 꺾어 샛길로 빠졌다. 인기척은 등 뒤로 사라지고 조용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초행이라 긴가민가했지만 '목욕합니다'라는 간판을 따라 걸었다. 이윽고 오늘의 목적지가 보였다.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 개'라는 동요 가사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입구부터 차례로 만수 여관 온천, 만수대중탕, 만수탕이라는 간판이 나타났다. 심지어 지도에는 '만수 목욕탕'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나는 그중 마지막에 있는 '만수탕'을 공식 이름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세 글자 이름을 좋아하니까. 


2층은 여관이다.
벳푸를 꼭 닮은, 옛모습 그대로의 입구                              오른쪽 정렬


그리고 입구를 본 순간 전율이 일었다. 이 입구, 익숙해도 너무 익숙했다. 벳푸에서 흔히 보던 온천 목욕탕의 입구와 똑 닮았다. 왼쪽은 여탕, 오른쪽은 남탕. 바깥 대문을 제외하고 안쪽은 허술한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것도 같았다. 딱 봐도 내공이 철철 넘치는, 그러나 무심히 카운터를 지키고 앉은 사장님께 요금을 건네고 수건 두 장을 받았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목욕 후 질문한다'라는 나름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그마한 탈의실과 그만큼이나 자그마한 탕이 있다.
면 고무줄로 묶인 열쇠 참으로 오랜만이다. 
사진으로 보수한 디테일.


무거운 커튼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자 스무 개 남짓의 로커가 있는 자그마한 탈의실이 나왔다. 세월이 느껴지는 디테일들이 곳곳에 있었다. 이를테면 로커 열쇠 끈이 면 고무줄이라던가, 여기저기 뜯어지고 부서져 고친 흔적들. 적어도 3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듯했다. 그 작은 공간 안에 냉장고며 선풍기, 드라이어기, 벽시계, 텔레비전, 의자, 평상, 체중계가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었다. 마니악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그마저도 매력적이었다. 


탕 안은 더 멋졌다. 작고 심플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나란히 있는 온탕과 냉탕이 입수할 수 있는 탕의 전부. 그마저도 탕 하나당 어른 두세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크기였다. 가운데에는 물을 퍼다 씻는 용도의 긴 타원형의 탕이 있고, 벽으로는 샤워기 자리가 네다섯 개 남짓이었다. 마침 할머니 한 분이 목욕 중이셨다. 할머니께 눈인사를 살짝 건네고, 샤워기 자리는 본체만체하고 할머니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데선 바가지 목욕이 제맛이니까. 


깨끗이 닦아 윤이 나는 푸른 타일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천수가 뿌옇게 눈 앞을 흐렸다. 의자와 바가지를 비누로 씻어내고 엉덩이를 붙인다. 바가지에 물을 그득하게 퍼서 정수리부터 물을 천천히 흘려보낸다. 몸을 타고 온천이 흐른다. 물맛이 제법이었다. 이런 데서 샤워기를 쓰는 건 바보짓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신이 나서 목욕하는 나를, 할머니는 꿈뻑꿈뻑 눈을 깜빡이며 한참 바라보셨다. 눈을 마주하고 말없이 그저 웃어드렸다.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서 온탕에 몸을 담갔다. 실크를 온몸에 두른 듯 매끄러운 물이었다. 이런 온천이 가까이에 있었다니, 멋모르고 바깥으로만 다녔던 지난 시간이 아까웠다. 냉탕도 훌륭했다. 많이 차갑지 않아 상쾌했고 물도 온탕만큼이나 매끄러웠다. 그때까지 본 체 만 체 말 한마디 없던 할머니가, 고개를 돌려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건네 왔다. "젊어서 그러나, 냉탕에 풍덩풍덩 잘도 들어가네. 내사 이제 심장이 쫄리고 다리가 시큰해서 못 들어가겠다." 아까보다 더 활짝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사장님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토록 그리웠던 온천을 원 없이 즐긴 뒤, 바깥으로 나왔다. 조심스레 사장님께 말을 걸어보았다.

"사장님, 여기 물이 참 좋네요." 

식당에서는 음식이 맛있다고 하고, 온천에서는 물이 좋다고 하면 그 뒤부터는 대화는 일사천리다. 자못 무뚝뚝해 보이는 사장님도 얼굴 표정이 환해지며 온천 이야기를 자연스레 해주셨다. 


"당연하지요. 여기 물은 온천 백 프로 아입니꺼. 쩌기 옥상에 있는 물탱크에다가 맨날 물 받아서 그걸로만 탕에 넣거든. 원래 온천 온도가 제법 높아요. 바로는 못써. 하룻밤 정도 받아서 식히지. 냉탕도 그래 해갖고 온천이라. 우리는 탕에 수돗물은 하나도 안 쓰지." 


역시, 착착 감기는 물맛이 보통이 아니더라 싶었다. 이왕 대화의 물꼬를 튼 김에 나는 이것저것 궁금한 점들을 모두 물어보기로 했다. 


"사장님, 제가 일본 온천을 좋아해서 조금 다녔었는데요. 여기 구조가 많이 비슷해요. 혹시 이 온천 언제 만들어졌나요?"


"아, 그게 얘기가 좀 긴데……. 여기 온천이 우리 친정 엄마가 하던 거예요. 개업은 67년도니까 50년 넘었네. 우리 엄마가 일본에 좀 있었어요. 그래서 일본에 온천 목욕탕 구조를 보고 참고를 해서 만들었다 하더라고. 원래는 일본에 있는 온천처럼 탕이 가운데 둥그렇게 딱 한 개였어요. 근데 내가 이걸 이십몇 년 전에 물려받으면서 너무 낡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고친 게 지금 구조고. 그래도 최대한 옛날 모습을 그대로 남겨 놓으려고 고친 거라. 다른 집들은 다 큰 건물 올리고 완전히 바뀌어버렸지. 근데 우리는 옛날 모습 그대로죠. 엄마 살아 계실 적에 항상 얘기한 것이, 시설도 좋지만 온천은 물이 제일이라고. 물 좋은 게 최고라고 했지. 그래서 나도 그거 그대로 배워서 하는 거예요. 
또 그렇게 고집스럽게 운영한 이유가, 우리 엄마가 소신이 있었어. 온천은 남들 한테 좋은 일 하려고 한다고 했어요. 이게 예전에 받은 봉사 상이예요. 예전에 고아원이나 보호 시설 같은 데는 목욕하기가 어렵거든. 그런 분들 목욕하고 가실 수 있게 날을 정해서 무료 목욕도 하게 해 드리고 그랬지. 그래서 상도 이렇게 받고. 아무튼 내가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운영하는 건 다 엄마가 남긴 말들 때문이에요. 
진짜 힘들어요 힘들기는. 설비 만지는 것도 보통이 아니고 보수할 것도 계속 생기고, 탕에 물 빼고 청소하고 채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매일 해야 하고. 단골들이야 알아준 다지만 아무래도 단골들이 나이가 있으니까 돌아가시는 분들도 많고. 아무튼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니까 반가워서 다 얘기하게 되네."


그밖에도 사장님은 이런저런 온천 자료들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동래 온천의 역사나 한일 온천 교류하며 발전해 온 이야기 하며, 생각지도 못한 귀중한 온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그저 물이 좋다고 생각했던 온천에 이렇게 많은 사연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모두가 변해가는 환경 속에서도 물맛을 지켜내는 일은 어지간한 뚝심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매끄럽고 맑은 온천만큼이나 사장님의 온천을 향한 애정 어린 자부심이 감동적이었다. 부디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주기를 바라며, 이 기록이 부디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 날의 기록을 마무리한다. 



온천 정보

만수탕ㅣ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장로119번가길 27-5

5:00 ~ 20:00, 매월 첫째 주, 셋째 주 월요일 휴무 ㅣ 성인 7,000원 ㅣ 수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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