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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세살이 May 04. 2018

공무원 그만두고 여행중인 30대의 성찰기, 우크라이나1


여행 역시 삶의 한 부분이어서

여행 중에도 안주하고 싶을 때가 더러 있다.


어떤 도시에 한 달 정도 머물게 되면,

그 누구라도 그 도시의 문법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게 된다.


더 이상 어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야 할지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쌀과 샴푸와 닭가슴살이

마트의 어떤 코너에 있는지도 안다.

한 달간 머무른 숙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이 되어 있다.


물론 다음 여행지가 기대되기도 하지만,

그 곳에서 며칠 동안 공존할 것이 분명한

긴장, 실수, 두려움 등은

우리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럴 땐 이미 적응이 끝난 여행지에서

안주하고 싶은 욕망이 불쑥거린다.


우크라이나에 가기 전에는 특히 그랬다.

서유럽과는 또 다른 이질적인 문화,

읽을 수 없는 키릴 문자,

미녀, 인종차별, 러시아와의 분쟁 같은

자극적인 이야기들은

낯선 곳에 대해 이미 오해하게 만들었다.


한 달간 머물렀던 우크라이나는

분명 이질적인 곳이었다.

우리의 가치관이나 시선과 달라

당혹스럽고 겁나는 부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들은 없었다.

오히려 다른 곳과 달랐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영감을 준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8월에 한 달간 머무른 곳은

우크라이나의 리비우라는 도시였다.

슬로바키아에서 낡은 침대기차를 타고

12시간 만에 도착한 리비우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낯선 곳에 더해진 어둠은

잔뜩 긴장해 있던 상태였던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했다.

기차역의 모든 곳이 무서워 보였고

모든 사람이 의심스러워 보였다.


대중교통이 끊겨 어쩔 수 없이

에어비앤비 숙소에 가기 위해 

역 앞에서 급하게 탄 택시 요금이

정상 가격의 세 배가 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조금 먼 미래의 일이었다.


우리는 낯설고 어두운 주택가 골목에서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초인종을 연신 눌러댔으나 대답이 없었다.

하필 숙소 주인은 우리의 도착시간을 

PM이 아닌 AM으로 착각했다.


천신만고 끝에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제야 우리의 긴장도 풀리기 시작했다.

40만원대에 집 전체를 빌린 숙소에는

개성 넘치는 인테리어가 가득했다.


우리를 두렵게 하던 어둠이 익숙해지자

예쁘고 신비로운 야경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섭게 느껴졌던 기차역도

낮에 다시 가 보니 건강한 활기가 넘쳤다.



리비우는 우리가 가 본 도시 중에서

가장 감수성이 넘치는 곳이었다.

슬로바키아에서 자연을 누렸다면,

우크라이나에서는 도시를 즐겼다.


빈티지한 건물들과 독특한 카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좁은 골목길,

멋진 아주머니들이 모는 귀여운 트램,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펼쳐지는

크고 작은 길거리 공연들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건조한 마음도

들뜨고 싱숭생숭하게 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시는 분들,

각종 예술을 하시거나 사랑하시는 분들은

꼭 리비우에 머물러 보셔야 한다. 


게다가 여름 한복판이었음에도

리비우의 날씨는 선선하고 온화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선풍기 한 번 안 키고

8월의 여름을 날 수 있었다.



여행 중 문화생활을 하고 싶은 분들에게

나는 발레 공연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백조의 호수 같은 주요 발레 스토리는

조금만 검색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몸짓 그 자체가 언어이므로,

말이 안 통하는 곳이라도

현지인과 외국인에게 전달되는 

감격의 정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


우크라이나는 발레 강국 중 하나다.

특히 리비우는 아주 저렴한 가격에 

수준 높은 발레 공연을 볼 수 있는

오페라 하우스를 보유한 흔치 않은 곳이다.


극장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에서도

작은 발레 공연들이 종종 펼쳐진다.

우리도 유서 깊은 건물의 작은 뜰에서

밤 9시에 펼쳐진 30분간의 발레를

단돈 500원으로 즐길 수 있었다.



리비우의 리차키프 공동묘지는

무려 묘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독특하고 창의적인 곳이다.


나라, 지역, 종교 등에 따라

묘지의 형태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보통은 몇 가지의 모양으로 수렴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여느 공동묘지처럼

단출한 십자가 비석이 딸린

그런 평범한 묘지들은 찾기 힘들다.


고인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상징들로

묘지들을 한껏 꾸며 놓았다.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과 함께

묘지를 보는 즐거움도 가질 수 있다.


팔을 높게 치켜든 묘지 위 동상을 보며

혁명가였던 고인에 대한 추억을

즐겁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한 이곳은

커피를 즐기는 방식도 다양하다.

알고 보니 리비우는 오래 전부터 

카페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다.


술이나 탄산음료를 특정 순서에 맞춰 

커피와 함께 마시는 것도 재밌었고,

핸드드립 커피를 커피잔이 아닌

와인잔에 마시는 것만으로도

커피의 맛뿐만 아니라

커피를 마시는 분위기도 달라졌다.


누구나 친숙한 커피,

세상 어디에나 있는 커피라도

조금 첨가하고 약간 바꾸었더니

색다르고 신선한 추억이 되었다.


낯설고 다른 곳을 

여행하는 재미 중 하나다.



우크라이나의 버스나 트램을 타면

꽤나 독특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이곳의 버스나 트램을 타려면

기사에게 승차권을 사야 한다.

버스를 탈 때 사람들은

뒷문으로도 자유롭게 타는데,

만원버스일 때는 버스 앞쪽의 기사에게

승차권을 사기가 어려워진다.


그럴 때는 승객 중 누군가에게

돈을 건네고, 그 돈은 몇 사람을 거쳐

기사에게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전달돼

그 사람이 대신 승차권을 구입해 준다.

구입한 승차권은 다시 몇 사람을 건너

돈을 건넨 사람에게 돌아온다.


이 사람들은 외국인이고 내국인이고를

가리지 않아서,

그저 무심하게 나에게도 돈을 건네기에

앞 사람에게 열심히 전달하곤 했다.


그 독특한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버스카드 단말기가 없어서인지,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높아서인지,

그저 관습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빠 보이지는 않은,

웃음 짓게 하는 그들만의 특성이었다.


익숙한 곳에 안주하는 것이 더 좋은지,

낯선 곳에 도전해보는 것이 더 좋은지

사실 아직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익숙한 곳에만 안주했다면

아마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일들을

우크라이나에서 겪은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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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며칠 후 우크라이나 2편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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