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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세살이 May 11. 2018

공무원 그만두고 여행중인 30대의 성찰기, 우크라이나2

우리가 한 달간 머물렀던 리비우는

우크라이나 도시 중에서도

가장 개방적인 곳 중 하나였다.


리비우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뀐 탓에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 공존하고 있고,

지금은 국경 근처에 위치해 있다 보니

관광객과 외부인의 유입도 많은 편이다.


그에 반해 수도인 키예프는

상당히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만을 여행했지만,

이질적인 그들의 문화는

묘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손에는 촛불을 든 채,

언뜻 들으면 주술과도 같은

사제의 기도 소리에 따라

그들의 첫 의식을 성스럽게 행하고 있는

신랑신부의 모습은

호기심과 더불어 경계심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키예프는

우크라이나 특유의 냄새를 

충분히 맡을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우리와는 다른 이들에 대해

경계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경계심이

타자에 대한 배제나 폭력이 아닌,

타자를 아우르는 이해와 관용이 되려면

그들을 보고 듣고 만나야 하지 않을까.


그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여행이 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인의 대다수는 크리스천이고,

또 그 중 대다수는 정교회를 믿는다.


그들은 초기 기독교의 형태와 관습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키예프에는 많은 정교회 성당들이 있는데,

그 화려한 외관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독실한 신앙심도

종교가 없는 나에게는 생경한 모습이었다.


성당을 지나치는 버스 안에서

눈을 감고 성호를 긋는 많은 승객들.

어떤 성자의 초상화에 키스하기 위해

100미터 이상 길게 줄을 늘어선 행렬.

차에서 내린 신부님에게 달려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붙잡고

좋은 말씀을 구하는 사람들. 

수도원 지하에 안치된 성인들의 미라와,

경건하게, 때로는 울먹거리며 

돌아가신 그들과 소통하는 신자들.


옳고 그르고를 따지는 것 보다는

무언가를 향한 사람의 믿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70여 년간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던

소련과 공산주의의 흔적도 

키예프 곳곳에 여전히 남아있는데,

지하철도 그 중 하나다.


전쟁 시에 방공호로도 활용하기 위해

100미터가 넘게 파 내려간 역에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놀이기구 수준의 빠른 에스컬레이터로

5분정도를 땅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


전쟁을 대비하고 지시했을 정치인들,

심혈을 기울여 이곳을 만들었을 설계자들,

죽기살기로 굴을 파 내려갔을 노동자들.


냉전의 시기는 어느새 지나갔고,

지금은 화려한 샹들리에와 예쁜 장식들이

바쁜 시민들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의 원전 사고는

3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동안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현재 체르노빌에는

방사능 수치에 문제가 없는 곳들을

둘러볼 수 있는 투어 상품들이 있다.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들은

우거진 나무들과 들개들이 차지했다.

방사능에 심하게 누출됐던 마을들은

아예 통째로 땅 속에 파 묻혀 있다.


원전 근무자들이 주로 거주해서

나름 부유했었던 프리퍄티라는 도시의

놀이공원, 병원, 수영장 등은

겨우 형체만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시 많은 체르노빌 사람들은

한평생 삶을 일궜던 이곳에서

떠나기를 거부했었고,

당국의 지시를 무시하고 다시 돌아와

지금까지 살고 있는 이들도 제법 된다.


원전 사고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과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들까지도

순식간에 송두리째 빼앗아 가 버렸다.


긴장되고 걱정도 많았던 투어였지만,

가장 효과적인 현장학습이었다.


이방인인 우리를 위해 개별적으로

영어 통역을 해준 가이드 세르게이,

우리에게 우산을 빌려주고

비를 몽땅 맞았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청년 검사 양반, 모두 정말 고마웠어요.



매년 8월 즈음부터

유럽의 축구 시즌이 시작된다.

우크라이나에도 나름 유럽에서

힘 좀 깨나 쓴다는 축구팀들이 있다.


마침 우리가 키예프에 갔을 때,

우크라이나의 명문팀인 디나모 키예프의

챔피언스리그 예선 경기가 있었다.


디나모 키예프는 좋은 경기력으로

스위스의 영보이스를 3대 1로 이겼다.

골이 터질 때마다

손이 얼얼해질 정도로

주위의 아저씨들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한 달간 머물렀던 리비우에도 

축구팀이 있었다.

하지만 믿음직스러운 구글마저도

그 축구팀의 경기장을 잘못 안내해서

우리와 몇몇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헛걸음하게 만들 정도로

정보도 부족하고 유명하지 않은 팀이었다.  


중하위권을 맴도는 성적에,

경기장도 꽤나 열악한 수준이었지만,

많은 리비우 사람들은 웃통을 벗어던지고

자신들의 팀을 위해 열정적으로 응원했다.


축구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무조건적인 내 편이 있다는 사실은

없던 힘도 나게 하는 마법과도 같은 것이다.


사실 축구에 큰 관심은 없지만

여전히 나를 위해 함께 경기장을 찾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여행을 떠난 후 3개월이 넘게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결혼식을 위해 했었던 파마 덕분에

3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었지만

8월의 여름에서 더 이상은 무리였다.


두려움이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내 의사가 정확히 전달될 수 있을까?

그것보다도 이곳의 헤어스타일이 

나에게 어울릴까?


많은 걱정을 떨쳐내지 못한 채

리비우의 어느 이발소에서

나를 담당할 이발사인 

드미트리와 악수를 하면서

그저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말했다.


드미트리는 정성스럽게 가르마를 탄 후

거침없이 내 머리를 자르면서

때로는 섬세하게 모양을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완성된 유럽식 포마드 머리는

생각보다 나에게 잘 어울렸다.


지금은 한 달에 한 번씩 이발소에 간다.

때로는 실패할 때도 있고

때로는 생각보다 만족스럽기도 하지만

여행 중 즐거운 한 꼭지가 되었다.



우크라이나를 떠나기 전날에

우리는 리비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처음에는 그렇게 낯설었던 도시가

이제는 대부분의 골목골목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부쩍 친숙해져 있었다.


지금도 사진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두 발로 매일 걸었던 길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한 달의 시간동안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내가 보고 느낀 우크라이나에 대해 

즐겁게 말해 줄 수 있다.


우리와 많이 달랐던 우크라이나는

그만큼 새로운 주제들과 다른 시각들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고,

그것들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색다른 거울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떠나

드라큘라의 나라 루마니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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