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오전 9시쯤에 출발한 알바니아 시외버스가
한 시간쯤을 달려
한적한 레스토랑 앞에 멈춰 섰다.
알바니아의 지방 도시인 블로러(Vlore)에서
또 다른 지방 도시인
사란더(Sarande)로 가는 버스였다.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타고 있는
이 버스에서 이방인은 나와 아내뿐이었다.
버스를 멈춘 기사 아저씨는
자신의 모국어로 크게 몇 마디를 외치고는
시동을 완전히 끄고 앞장서 내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버스에 탄 사람들이 대부분
슬금슬금 내리는걸 보니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상황인 것 같았다.
나와 아내도 조심스럽게 버스에서 내려
해발 몇 백 미터쯤은 됨직한 도로에 발을 디뎠다.
상대적으로 포장이 잘 된
평평하고 곧은 해안도로가 거의 끝나고,
꼬불꼬불하고 좁은 산간도로에 막 들어선 참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경치가 좋았지만
12월의 공기는 차가웠다.
따뜻한 커피나 한 잔씩 마실 생각으로
레스토랑의 문을 열었다.
대각선 방향으로 버스기사 아저씨가 익숙한 듯
부지런히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승객들도 저마다의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는 깔끔한 흰색 테이블보가
꼿꼿하게 펼쳐진 창가 식탁 한 쪽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옆 자리에서는 한 청년이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초록빛 눈을 가진,
잘생긴 사슴을 닮은 알바니아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두리번거리는 우리를 보더니
자신의 식사를 멈추고 따뜻한 미소로
우리에게 식사나 커피를 원하는지 물었다.
그를 식당의 종업원이라고 생각한 우리는
커피 두 잔을 부탁했다.
알바니아의 커피는
옆 나라 이탈리아에 못지않게 훌륭하다.
우리가 따뜻하고 진한 커피를 몸 안에 채우는 사이,
종업원이라고 생각했던 그 청년이
우리의 커피 값을 계산했다.
그제야 그 청년이 우리가 타고 온
버스의 승객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버스요금을 걷는 기사 아저씨가
우리에게 줄 거스름돈을 가지러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도,
도중에 버스를 바꿔 타야 할 일이 생겼을 때도
그 청년은 우리에게 다가와 통역을 해 주고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답례를 할 게 마땅치 않아서
우리가 갖고 있던 군것질거리 몇 개로
고마움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사슴을 닮은 초록빛 눈의 그 청년은
히마레(Himare)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내리고 우리와 작별했다.
낯선 동양인들에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풀었던
이름도 모르는 그 청년,
잘 지내고 있을까?
이야기 둘.
우리가 그 아저씨를 만난 곳은
알바니아 블로러(Vlore)의 해변이었다.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알바니아의 거리를 지나다니다
언제라도 스쳐 지나갈 법한
평범한 외모의 아저씨였다.
사실 먼저 다가간 쪽은 우리였다.
그 아저씨가 지도로 보이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종이로 된 지도가 필요할 때가 있다.
스마트폰의 구글맵도 훌륭하지만
어떨 때는 너무 많은 정보가 혼란스럽다.
하지만 여행지의 관광안내소 같은
기관에서 만든 현지의 종이 지도는
약도와 같아서 중요한 정보들이 도드라져 있다.
종이 지도를 펼쳐놓으면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지역을
한 눈에 파악하기에도 좋다.
블로러의 종이 지도를 얻기 위해
시내의 관광안내소를 몇 차례 찾았었지만,
투명한 유리창으로 인테리어 된 작은 안내소는
항상 문이 닫혀 있었다.
해변에서 만난 그 아저씨에게 물어보면
지도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관광객들에게 지도를 나눠주는
관광안내소 직원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들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그 아저씨는
활짝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자연스럽고 순수한 그의 웃음에서,
우리의 좁은 상식으로는
몇 분 후에 밝혀질 아저씨의 정체를
추리해 내기는 어려웠다.
아쉽게도 아저씨가 들고 있던 건
지도가 아니었다.
산과 호수, 폭포의 사진들이 실려 있는
컬러 인쇄물이었다.
알바니아의 명소들을 홍보하는 팸플릿인 것 같았다.
아저씨는 활짝 웃으며
내용을 설명해 주고 싶어 했다.
알바니아어와 이탈리아어를 섞은
아저씨의 말을 대부분 이해할 수 없어서
서로를 쳐다보며 멋쩍게 웃는 순간이 많았다.
그래도 아저씨는 인내심이 대단했고,
마침내 우리는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저 산 너머에 깨끗하고 맑은
샘물이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알바니아를 찾은 사람들에게
이곳의 자랑거리를 알리고 싶은,
알바니아를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뒤이어 아저씨가
화장품 카탈로그를 보여줬을 때
그 상황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저씨는 알바니아의 깨끗한 물로 만든
화장품들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제품 사진들 아래에는
알바니아 화폐단위가 붙은 가격들이 적혀 있었다.
외국인에게 화장품을 파는 방문판매원은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우리는 약간의 실망감과 씁쓸함을 갖고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아저씨는 몇 가지 자료를 더 설명하기 시작했다.
실버, 골드, 다이아몬드...
그리고 피라미드 모양의 그래프.
더불어 서명란이 뚜렷한 한 장의 계약서.
다단계였다.
낯선 동양인들을 붙잡고
다단계 영업을 했던
사람 좋은 웃음을 가진 그 아저씨,
잘 지내고 있을까?
이야기 셋.
여행을 하다보면
우리를 궁금해 하는 현지인들이 종종 있다.
그들이 질문하는 패턴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우선 “어디에서 왔어요?”라고 묻는다.
“중국인인가요?”라고 묻기도 한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어요.”라고 답하면
그들은 호감을 나타내는 감탄사와 함께
잠시 고민하다가
“북한, 아니면 남한?”이라고 재차 묻는다.
“남한에서 왔어요.”라고 알려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한에 대한 안 좋은 평가를 들려준다.
“여기서 뭐해요, 일? 여행?”
또는 “여행해보니 알바니아는 어때요?”
라는 질문도 이어진다.
이렇게 약간의 담소가 끝나면
서로에게 행운을 빌어주고 작별한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하다고 할 만한 일도 아니다.
알바니아의 해안도시 사란더(Sarande)에서
한 아저씨가 우리를 부르며 다가왔을 때도
우리가 항상 해왔던 정형화된 답변들을
또 한 번 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우리에게 잰걸음으로 다가왔다는 점만 빼면
평소와 다르지 않은 현지인과의 만남이었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의 체격은 단단하고 건강해 보였다.
12월의 쌀쌀한 날씨임에도
긴팔 티셔츠에 조끼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지만 추워 보이지 않았다.
그 아저씨는 설렘이 묻어나는 미소로
우리에게 물었다.
“중국인들인가요?”
예상이 가능했던 첫 질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한국에서 왔어요.”라고
대답했을 때의 아저씨의 표정은 예상과는 달랐다.
설렘과 기대의 미소가 사라지고
실망감이 드리워졌다.
마치 우리가 중국인이길 바랐던 눈치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아저씨는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남한인가요, 북한인가요?”
빈번히 출제됐던 기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남한이라는 우리의 답은
아저씨가 원했던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아저씨의 얼굴에 실망감이 더해졌다.
그의 질문은 이것이 끝이었다.
곧이어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피력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아주 훌륭한 나라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끼고 있던
굵고 빨간 반지를 보여주었다.
누군가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아저씨는 그 사람을
소비에트 유니온의 지도자였던
레닌이라고 소개했다.
러시아와 푸틴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열정적으로 “퉤”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물론 그는 우리에게
어떠한 위협과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끝마친 아저씨는
손을 흔들며 자신이 가던 길을 갔다.
낯선 동양인들이
중국이나 북한에서 온
사람이었길 바랐던 그 아저씨,
잘 지내고 있을까?
여행을 하면서 겪은 경험들은
수치화하기 어렵고, 등급화하기 어렵고,
서열화하기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자기소개서나 이력서,
경력기술서 같은 곳들에 채워 넣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와는 다른 환경과 제도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는
나의 시각을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그들과 함께한 생생한 순간들은
나만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한 챕터가 되기도 하고,
한 페이지가 되기도 하고,
때론 한 구절이 되기도 했다.
알바니아뿐만 아니라
내가 여행한 모든 곳에서 그랬다.
우리는 알바니아를 떠나 그리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