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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세살이 Jan 24. 2019

공무원 그만두고 여행중인 30대의 성찰기, 그리스편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Athens)로 떠나기 전까지

우리는 7개월 동안 줄곧 동유럽 안에서만 머물렀다.


폴란드에서 시작해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고 알바니아까지.


여행지로 알려져 있는 나라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곳들에서 각각 한 달씩을 여행하기로 한 결정은

꽤나 모험적이고 도전적이었다.


분명 동유럽에서의 여행은 쉽지 않았다.

정보와 인프라가 부족해서 고생스러웠다.

헛된 시간을 보내게 될까봐 불안했다.

우리에게 쏠리는 현지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보니,

이 7개의 나라들은 내 마음 속 여기저기에

뿌리를 내리고 저마다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유명 관광지가 아닌,

동유럽의 작은 도시들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했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의 나는

예전의 나보다는 확실히 대담해졌다.

세르비아의 어떤 지방도시나

알바니아의 어느 교통편에 대한 정보가 없어도

직접 가보면 어떻게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오히려 내가 가진 정보들에 갇혀 있지 않은,

예측 불가능한 순간들이 선물처럼 주어졌다.

숙소 주인인 야로 아저씨를 따라

버섯을 따러 간 슬로바키아의 숲에서

야생 사슴을 만났고,

루마니아의 숙소 뒷마당에 잔뜩 열린 

프룬과 머루포도를 매일매일 실컷 먹었다.


안정과 도전 사이에서,

도전에 가까운 여행을 했던 7개월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리스 아테네로 향하는 발걸음이 살짝 무거웠다.

그리스는 이미 명백하게 검증된,

도전보다는 안정에 가까운 관광지였기 때문이다.



굳이 내가 그리스에 대해 한마디 더하지 않더라도,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의 경험과 평가는

홍수를 이뤄 넘칠 정도로 많았다.


그리스와 아테네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정보는 충분했다.

그리스로 가는 길은 평탄했고,

아테네에 가게 됐을 때 우리가 가야할 곳들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파르테논 신전에 갈 것이고,

그리스식 샐러드를 먹을 것이고,

산토리니에 가게 될 것이다.

예측이 불가능한 여행의 매력에

빠져있던 나에게 그리스는 조금 따분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로 갈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날씨였다.

1년이 넘는 여행에서

부피가 큰 겨울옷을 가지고 다니기에는

이미 우리의 생필품들만으로 버거웠다.

그리스의 겨울은 가벼운 외투 정도만 있으면

충분할 정도로 온화하다고 들었다.

떠돌아다니는 유목 여행 생활에서

겨울바람을 견뎌 낼 자신은 없었지만,

너무 안정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리스행이 결정되고 나서

조금씩 안도감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동유럽의 여느 도시를 방문하기 전에는

걱정과 긴장으로 불안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가이드북에 없는 도시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여행 루트는 우리 스스로 알아보고 구성해야 했다.


하지만 그리스에 대한 정보는 넘쳐서 문제였고,

아테네를 여행하는 방법은

수많은 사람들이 개척해 놓은 상태였다.

관광객들을 위한 모든 것이

충분히 갖춰져 있을 게 분명했다.

안정된 여행지인 그리스는

특별히 걱정할 거리가 거의 없어 보였다.


도전으로 기울어져 있던 우리의 여행은

7개월 만에 안정 쪽으로 선회했다.

나는 여전히 도전보다는 안정을 선호하는 걸까?



우리의 에어비앤비 숙소는

아테네의 외곽인 일리우폴리(Illioupoli)라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상대적으로 정비가 잘 되지 않은

동유럽의 지방 도시들에 오래 있었던 탓인지,

처음 도착한 아테네는 문명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하철이 있을 뿐 아니라

구글맵의 지하철 시간표가 대체로 일치했다.

주택가는 깔끔할 뿐 아니라

모든 집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온기가 느껴졌다.

크리스마스 시즌이었기 때문에

주택 발코니 곳곳에는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로맨틱한 조명들과 함께

굴뚝을 향해 기어오르는

산타할아버지 인형들이 귀엽게 매달려 있었다.


15도 안팎의 따뜻한 그리스의 날씨는

나를 가장 기분 좋게 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발코니의 문을 열고 나가,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고 나면

몸에서 갓 말린 포근한 빨래 냄새가 났다.

그때의 한국의 겨울 기온이

영하 15도를 넘나들고 있었기에

더욱 느껴졌던 상대적 행복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길거리나 개인 주택의 마당에 심어져 있는

귤나무와 레몬나무들은 풍요로움을 더해 주었다.

이 풍성한 과일나무들만 보고 있으면,

그리스가 경제 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현실이

전혀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집 근처의 대형 마트들과 화려한 쇼핑몰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어서 편리한 소비가 가능했다.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고대 유적들에서는

인간에 대한 경외감을,

수니온곶과 피레우스에서 만난

그리스의 에게해에서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꼈다.

기대했던 것처럼,

그리스에서의 여행은 안정적이었다.



우리는 아테네에서 꼭 해야 할 것들의 목록을

하나하나 달성해 나갔다.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파리에서 꼭 가야 할 핫플 5곳’,

‘도쿄에서 반드시 사야 할 인생템 10가지’ 같은 것을

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방식의 여행은 목표 지향적이어서 분명하고,

그만큼 빠르고 편리하다.

정해진 루트를 따르면 되기 때문에 보수적이고,

그래서 무엇보다 안정적이다.

나 역시도 10년 전에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했을 때,

모두가 가봐야 한다는 명소와 맛집을 방문하고,

인증할 사진을 찍은 후,

계획했던 목록에 모두 줄을 긋고 나면

미련 없이 다음 나라로 재빨리 이동했었다.

마치 누군가가 부여한 숙제를

해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방문해야 할 곳, 먹어야 할 것, 사야 할 것 등

아테네에서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모두 다 하는데 열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아테네에서 보내기로

계획한 시간은 한 달이었다.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 순간,

더 이상 내가 아테네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아테네의 모든 곳들이

지루하게 느껴지기조차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알아봐야 했던

동유럽에서는 한 달의 시간이

짧다고 여겨졌던 것 같은데...


여행의 안정성이란 것은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해 주는 과정에서 확보되는 경우가 많다.

패키지관광이나 현지 가이드도 그렇고

정해져 있는 소위 국민 루트를 따르는 것도 그렇다.

이런 여행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만큼

효율이 더해지지만,

시간을 들여 자연스럽게 채워지는

여행지에 대한 애정까지는 얻기 어려운 것 같다.


우리는 아테네를 소극적으로 대했고,

아테네와 우리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재정문제가 발생한 것도

우리의 활동반경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리스의 물가는 동유럽보다 월등히 높았다.

대부분의 동유럽에서는 하루에 3, 4만원이면

두 사람의 생활이 가능한 수준이다.

저 금액이면 점심을 사 먹고,

커피와 디저트를 먹고,

한 군데 정도 입장료를 내고,

장을 봐와서 저녁을 해 먹는 게 가능했다.

한 달 생활비의 상한선을 정해놓고 썼기 때문에,

소비하고 남은 금액은 저축해 놨다가

옷 같은 것들을 사며 행복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스의 물가는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외식비는 물론이고,

식재료나 생필품의 가격도 그랬다.

물론 관광지의 입장료와 밥과 커피는 더 비쌌다.

하루 3만원으로는 점심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했다.


동네의 저렴한 레스토랑에서 케밥을 먹거나,

숙소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타서

종이컵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노력도 했지만

결국 우리는 한 달 생활비를 기준으로

꽤 큰 적자를 마주하기에 이르렀다.

한 달에 한 차례 일요일에 있었던

유적지 무료입장과,

4만원을 주고 만들었던 한 달 무제한 교통카드가

그나마 우리의 숨통을 조금 트이게 해 주었다.


하지만 아테네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일조차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뱃삯과 숙박비 등이 무서워

필수 관광지라고 불리는

산토리니나 크레타 같은 섬에 갈 수 없었고,

절경을 자랑한다는

메테오라의 수도원에도 갈 수 없었다.

다음 여행지로 계획했던 스페인의 체류 기간을

한 달에서 2주로 줄이기로 하고,

우선 물가가 저렴한 터키로 가

한 달을 머물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관광지의 유명세는 우리에게

안정감을 선사했지만,

그 안정감은 공짜가 아니었다.

그에 상응하여 따라온 대가가 분명히 있었다.



물론 나는 불확실한 동유럽 여행에

조금 지쳐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정적인 아테네를 핑계 삼아

누군가가 정해주는 여행을 하며

편하게 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게 갖춰져 있는 아테네가

내 마음에 소극과 나태를 심고,

그것들이 내 발걸음을

수동적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숨겨진 장소들이라도

조금 더 찾아봤어야 하는데,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게 사실이다.


만약 나에게 그리스를

다시 여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 여행에서는 가지 못했던

그리스의 섬으로 가고 싶다.

그때는 남들이 다 가는 유명한 관광지인

산토리니나 크레타 말고,

배편이 허락하는 한 관광지가 아닌

평범하고 조용한 그런 섬에 한 번 가보고 싶다.


불확실할 것이고,

그래서 안정적이지는 않겠지만

그곳에는 분명 나를 좀 더 적극적으로 걷게 할

풍경과 사람들과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안정과 도전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나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할 것들이

많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리스를 뒤로 하고,

나와 아내는 터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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