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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 May 24. 2018

내가 사랑한 너의 쇼팽

[사랑의 흔적] 음악

내 연애사 속에서 첫사랑이라 이름할만한 대단한 사랑으로부터 10여 년이 흘렀건만, 사람은 역시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주로 나는 ‘나한테 관심 없는 만인의 연인’을 짝사랑하는 타입인데, 그들은 하나같이 꼭 한 분야 이상 매력적인 취미나 특기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음악이라던지, 여행이라던지, 사진이라던지 하는 것 말이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취미이지만, 콩깍지가 제대로 씐 상태에서는 상대가 햇빛에 눈 부셔하는 모습조차도 하루 종일 되새김질하는 나라서.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들이 그 사람을 반짝이게 하는 것 같았다.


일이든 사랑이든 마음이나 에너지를 모두 쏟아붓다 보니 짝사랑이 시작되면 내 일상이 온통 그 사람이 되었고, 그 사이에서 우리의 공통분모를 찾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밀당이나 내 마음 다스리기가 다 쉽지 않았던 첫사랑은 나에게 가장 큰 행복과 슬픔을 동시에 주었다. 3년에 걸친 외사랑을 이뤄내며 나는 분명 행복했지만 연애 기간 내내 철저히 을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 사람 옆에서 늘 초라하게 자존감을 잃어갔다.

난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연애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만나는 내내 끊임없이 불안하기만 한 내 모습은 객관적으로 볼 때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낭떠러지 위에서 내가 잡은 동아줄을 놓아줄까 말까 장난치는 듯한 그의 모습도 좋아 보이지 않았고.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그걸 쉽게 아는 사람은 정말 최악이다)


큰 맘을 먹고 그의 학교 근처로 찾아갔다. 빙판이 져서 도로가 꽁꽁 얼었는데 우리는 손도 잡지 않고 걸었다. 몇번이나 미끄러졌지만 앞서 걷고 있는 그는 한번도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이미 얼어있는 그의 마음을 녹일 방법은 없어 보였다.

들어간 바에는 신청곡이 가득 적힌 메모지들이 붙어있었고, 좋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런 날 오기는 아쉬운 멋진 바였다.

우리는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마주 보고 앉았다. 해야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들어야 할 말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누가 이 침묵을 깨고 그 말을 먼저 하느냐, 그래서 누가 나쁜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였다.

빈 속에 애꿎은 맥주를 몇 잔이나 마시고 나서 먼저 입을 뗀 것은 결국 나였다.


“헤어지자.”

“그래. 이제 나 가도 되지?”


와!

나는 몇 달을 혼자 속 끓이고, 고민하고, 술까지 마시고야 간신히 내뱉은 말인데, 너는 “그래”라며 쉽게 결정해버리는구나. 그 말이 이렇게 가벼울줄이야. 헤어지자는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듣고 바로 나가버린 그 사람이나, 혼자 남아 연거푸 술을 더 마신 나나 서로에게 참 진상이었다. 그에게도 나와의 연애가 흑역사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그렇게 첫 이별을 맞이했다.

 

끝맺음마저도 이러했던 우리는 연애 중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의 모든 것을 존중해주지 않았던 그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 장르까지도 무시했는데, 그때 당시에는 그가 듣는 고귀한 클래식이라던지 기교 넘치는 메탈 장르의 음악을 들어보겠다고 매일같이 유튜브 영상이나 클래식이 나오는 라디오를 챙겨 들었다.

음악 이야기를 하며 들뜬 모습이 보고 싶어 오늘 들을 곡을 추천해달라거나, 전에 언급했던 연주자 영상을 찾아 듣고는 너무 좋았다며 그의 안목을 칭찬했다.

그래서 음악은 곧 그를 떠올리게 했고, 마음이 바스러진 후 나는 한동안 음악을 듣지 않았다.

후에 그는 헤어지고 마음 아파한 나에게 미안하기보다는 나에게서 음악을 빼앗아갔다는 사실이 더 미안했다고 고백했다.(음악보다 귀하지 않은 비루한 내 마음이여...)


내가 왜 몇 년이나 이런 사람에게 자존심 다 버려가며 매달리고, 못 잊어서 좋은 사람들을 놓치고, 마음 아파하고 눈물 흘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첫사랑을 아주 지독하게 앓은 덕분에 연애에서 내 마음을 보호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웠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 사람을 마음 다해 사랑하는 내 모습도, 매일매일 이름만 봐도 설레는 사랑을 하는 것도 좋았으니까. 이게 좋은 연애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엔 이미 내 마음에 그 사람이 한톨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큰 값을 치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연애 시절 열심히 공부했던(?) 음악이나 연주자들이 들리거나 나오면 그때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요즘엔 음악을 들어도 그가 떠오르지도 않고, 취향에도 맞지 않는 클래식을 굳이 찾아 듣지도 않는다.

하지만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음악이라는 분야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해, 이젠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게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이 생겼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 사람 덕분이 맞다. 나에게 음악을 빼앗아가기도, 선물해주기도 한 그에게 고맙다고 해야할 것 같다.


오늘도 그는 지금 기분이나 날씨에 적당한 클래식을 하나 골라 밤새 들을 것이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좋아하는 곡을 하나 골라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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