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조선시대부터 수도로 지정되어 600년 넘게 이어진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이를 증명하듯 서울 시내에는 5개의 궁궐이 있다. 그중 면적은 작지만 가장 접근성 좋고 다채로운 볼거리를 자랑하는 곳은 시청역에 위치한 덕수궁이 아닐까?
덕수궁 돈덕전
덕수궁은 임진왜란때 임시행궁으로 지정된 후 다른 궁에 비해 왕궁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고 규모도 작지만 특별한 곳이다. 고종이 자주적 근대 국가를 선언하며 정궁으로 승격시켜 머문 곳이라 석조전 같은 서양 건물과 분수, 왕이 커피를 마시던 정관헌과 최근 복원된 연회장 겸 외국인 접견실이었던 돈덕전도 있다. 전통 건물과 20세기 초 유행했던 근대 건물의 조화가 어우러져 다채로운 곳이다.
1909년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석조전 구관. 완벽한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을 지녔다. 완공 후 고종이 귀빈을 접대하는 용도로 쓰였다.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출범으로 서울이 조선의 왕도에서 대한제국의 황도로 위상이 변하면서 궁내에 양관으로 세워졌다. 닮은 듯 닮지 않은 쌍둥이 같은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1909년 영국인 건축가 하딩이 설계한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이다. 2014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한 본관으로 우리가 ‘석조전’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곳이다. 다른 하나는 석조전 서쪽에 위치한 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신관이다.
1938년 이왕가미술관으로 지어진 석조전 신관.
일제는 본격적인 식민 통치가 시작되자 경성에 있던 5대 궁궐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경복궁에는 총독부가 들어섰고 창경궁은 동물원이 되어버렸다. 1931년에는 덕수궁을 공원화하기로 했다.
1933년 덕수궁 일반인 공개를 시작으로 1938년에는 대한제국 시절 황실(이왕가)에서 모은 미술품인 ‘이왕가 컬렉션’을 전시하기 위한 ‘이왕가미술관’을 지었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대목이 있다. 우리나라에 ‘미술’이라는 용어가 쓰인 시기는 언제일까? ‘미술’이란 용어는 19세기말 우리나라에 유입된 신조어였다.
알려진 바로는 1881년 고종이 일본에 파견한 시찰단 보고서에 ‘미술’과 ‘미술관’이란 용어가 처음 발견되었다고 한다. 1910년대 이후부터 미술이 ‘순수시각예술’로 인식되면서 미술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고 이때부터 1세대 서양화가와 미술단체들이 출현했다.
고종과 순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황실에서도 미술가들을 후원하며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친왕(1897~1970)은 선왕들에 비해 적극적인 미술애호가의 면모를 보여 서양화와 일본화를 대거 구매했다고 한다. 이 즈음 우리나라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북경과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처럼 왕실의 후원을 받는 고유의 컬렉션이 존재했고 미술관을 운영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왕가미술관(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전시를 보러 가는 조선의 여인들
1909년 준공된 덕수궁 석조전 구관은 본래 고종의 업무공간으로 지어졌으나 고종 승하 후 방치되어 있다가 1933년 이왕가 미술관으로 먼저 운영되었다. 1938년 신관이 지어지자 일본 미술은 구관에, 한국 고미술은 신관에 전시했다. 그리고 석조전 구관과 신관을 합쳐 “이왕가미술관”으로 통칭했다.
석조전 신관은 대한제국 시절 영국인에 의해 지어진 구관과 달리 아무래도 식민지 시대라 그런지 일본인 건축가 나까무라 오시헤이가 설계했다. 그는 조선에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중앙고등학교 건물과 조선은행 군산지점 등 다수의 은행 건물을 지었다.
석조전이 이왕가미술관이 되면서 대중들은 한국 고미술은 물론 일본 근대 서양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서구 미술의 영향받은 일본의 근대미술은 당시 미술계는 물론 조선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 것 같다. 실제로 하루에 수 천명의 관람객이 입장할 정도로 성황리에 운영이 되었다.
해방 후에 덕수궁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69년 그 소장품들이 국립박물관에 통합되었다가 나중에 이왕가미술관 소장품이었던 조선 고미술과 일본 근대미술품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들을 전시하는 기획 전시실로 이용되고 있다.
올해 화제가 된 한국근현대자수전
아마도 연재에 소개한 옛 건물들 중 유일하게 처음부터 전시공간으로 지어진 곳에 해당될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전시 주체와 내용은 바뀌었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지어지면서 서울관이 동시대미술을 주로 소개하는 반면 이곳에서는 근현대 미술품이 선보인다. 특히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장인 이쾌대.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 등 근대미술의 걸작전이 수시로 열려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특히 3월 말~4월 초에 덕수궁미술관에 가는 걸 추천한다. 어느 계절에 가도 멋지지만 미술관입구로 진입하는 길에 자두꽃이 만발하기 때문이다. 자두꽃은 대한제국의 상징 문양이다. 당시에는 ‘오얏꽃’이라고 불렀는데 석조전 구관 삼각 페디먼트에 새겨진 오얏꽃 문양의 실물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이다.
대한제국의 상징 자두나무꽃.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덕수궁에서 들르면 미술관도 꼭 들르기를 추천한다. 덕수궁 입장료에 관람료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두 배의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