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에 들어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로 인해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 버린 것들이 한 둘이 아니다. 가장 아쉬운 것 중 하나는 동네에서 은행 지점들이 하나둘씩 사라진다는 거다. 한때 은행이 차지했던 자리는 대형 체인점 카페로 변신하거나 한의원, 음식점 등 다양한 업종으로 채워지고 있다. 원래 은행들은 위치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지 은행이 떠나간 곳은 여간해선 공실로 방치되지 않는다.
그중 옛 은행 건물을 갤러리로 이용하고 있는 곳이 있다. 서울 한복판인 중구 을지로 4가에 자리 잡은 복합문화공간인 ‘H.art1’이다. 1968년에 지어진 건축물인 이곳은 과거 하나은행 을지로 지점이었다. 오랫동안 은행 건물로 사용하다가 폐점하고 리모델링해 2022년 11월 금융권 최초 개방형 수장고 ‘H.art1’으로 탈바꿈했다.
H.art1은 금융권 최초의 개방형 수장고 전시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담배공장을 개조해 만든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처럼 예술품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수장고 역할을 하면서 전시 공간도 겸하는 ‘개방형 수장고’다. 하나은행의 H와 미술의 art, 은행의 모티브인 1을 합성해 이름을 지었다.
폐점된 한국은행을 전시장의 일부로 사용했던 2018부산비엔날레
2018년 부산비엔날레서 폐점한 한국은행 건물을 전시장으로 사용했던 게 생각났다. 오래된 은행 건물이 주는 레트로한 느낌과 육중한 은행 수장고에서 미디어아트가 선보이는 등 발상 자체가 참신하게 다가왔었다. 그때 잠깐 전시장으로 쓰였던 한국은행 건물은 철거했는지 아직도 있는지 궁금해진다.
H.art1은 총 5층으로 구성되었다. 카페가 있는 1층을 지나 2층으로 진입하면 하나은행 설립자가 수집한 미술품 110여 점이 펼쳐진다. 대표작이라고 할 순 없지만 백남준의 작품은 물론 김창열, 유영국, 김수자, 윤형근, 이우환 등 유명 작가의 판화 혹은 유화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설립자가 보유한 3천여 점의 미술품 중 엄선한 것이라고 하며 주기적으로 전시물이 교체된다. 작품들은 레일이 달린 철망에 전시되어 낮에는 개방형 수장고에 펼쳐 놨다가 미술관이 문을 닫으면 다시 창고 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3층 VIP 수장고에서는 하나은행 주요 VIP 고객을 대상으로 120호 이하 작품을 보관해 주는 유료 저장소다. 몇 년 전 하나은행이 출시한 ‘예술품 투자 신탁’ 상품을 소개하는 공간으로도 이용된다. VIP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 따로 작품 전시는 하지 않고 있다.
4층은 커뮤니티 공간이다. 근현대 원로화가들의 작품들이 선보이는 2층과 달리 젊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들이 주로 선보이는 기획 전시실이다. 설치미술은 물론 관객참여형 가상체험 공간도 있어 MZ세대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한편에는 세미나룸도 있다. 이곳은 아트테크 스타트업 기업들이 관리한다.
마지막 5층은 루프탑으로 레스토랑이 입점해 힙지로를 조망하며 식사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미술품을 구경하다가 지치면 각 층마다 마련된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편히 쉴 수 있고 1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1층 카페에는 ATM 기계도 이용할 수 있다.
최근 몇 년 간 을지로는 힙지로라고 불리며 MZ세대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주로 오래된 건물에 입점한 맛집과 술집, 카페 등이 핫플로 떠올랐는데 을지로 일대에 크고 작은 갤러리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중 H.art1은 5층 건물 전체를 이용한, 가장 규모가 큰 갤러리일 것 같다. 을지로에 오면 옛 서울의 모습도 즐기며 H.art1에서 예술품을 감상하고 가면 오감이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근처에 을지로에서 가장 먼저 터를 잡은 작은 갤러리 ‘상업화랑’도 있으니 연계해서 같이 구경하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