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를 구부정하게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척추 수술 N천만 원이다, 허리 펴라.'. 맞는 말이다. 내가 실제로 알아본 척추측만증 수술비가 그 정도다. 나는 허리가 40도보다 살짝 더 휜 지체장애인이다.
딱 달라붙는 옷을 입은 날 유심히 보지 않으면 내가 척추측만증 장애인이라는 것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거다. 내 오른쪽 날개뼈는 둥글게 톡 튀어나와 있고, 왼쪽 허리는 유난히 잘록하게 파였다. 오른쪽 허리도 똑같이 잘록했으면 더 좋았으련만. 아무튼, 그런 비대칭을 안고 살아온 지 벌써 10년이 넘어가는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일부러 박시한 옷만 찾아 입으면서 내 비대칭을 감추려는 노력을 했다. 지금은 그냥 산다. 자유롭게 산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더라. 그래서 옷이라도 내가 입고 싶은 거 입고 있다. 몸매가 드러나게 달라붙는 티도, 등 뒤 날개뼈가 다 드러나는 원피스나 슬리브리스 티도 다 입는다. 처음엔 티가 많이 나나 걱정했지만... 역시, 걱정할 게 옷 말고 정말 많아서 괜찮아지더라.
평소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밝힐 일은 없지만 어디선가 드러내게 되는 곳에선 사람들의 반응이 거의 똑같다. '저 사람은 왜 장애인이지?'라는 궁리가 순간 얼굴에 스쳤다가, 예의를 차리려는 표정으로 금세 바뀐다. 당황한 내색을 히지 않으려는 노력이 감사하기도 해서 바로 내 장애의 이유를 말씀드리며 궁금증을 풀어드린다. 아, 제가 어렸을 때부터 척추측만증이 심하게 와서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모두 아~ 하고 안도하며 가벼운 걱정을 해주신다.
휜 허리에 무뎌지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중학생 때였나, 다 같이 버스 앞에 일렬로 줄을 서서 결핵 검사를 매년 했던 기억이 난다. 엑스레이 촬영본이 출력되는 화면이 일렬로 서있는 친구들의 정면에 있었다. 방금 들어간 친구의 엑스레이 촬영 결과가 모두에게 공개되는 배치였다. 뼛속까지 벌거벗은 기분이 이런 기분이구나. 사실 그 당시 친구들은 그 화면에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을 거다. 누구도 결핵을 판단할 수 없고, 화면은 거의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차례엔 저 곧게 뻗은 척추뼈가 S자로 휘어 보일 걸 아니까. 그 순간이 정말 무섭고 부끄러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 촬영을 마치고 나오면 다음 친구가 얼른 촬영을 끝내 내 S자 허리가 얼른 화면에서 사라지길 바랐다.
성인이 된 어느 날에도 정말 수술을 해야 하나 몇 날며칠을 인터넷 세상에서 살기도 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 소변줄을 꼽고 있어야 한다는 척추측만증 수술 후기가 너무 무서워 꿈을 꾼 적도 있었다. 사귀던 남자친구 앞에서 괜히 허리 굽은 걸 티 내지 않기 위해 등 뒤로 바짝 힘을 줬던 때도 있었지.
그런 날을 무사히 지나 지금의 내가 되었다. 장애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정말 작은 혜택들을 누리면서 위안 삼고 있다. 간혹 영화를 오천 원에 볼 수 있고, 서울 시내 교통비가 무료라고 하면 부럽다고 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긴 하다. 머리를 콱 쥐어박고 싶다. 영화 제 값 주고 보고, 교통비 내고 일자 척추를 얻을 수 있다면 난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면 알아서 뻘쭘해한다.
그래도 아직 어려운 게 많다. 여기엔 장애인이 있을 수가 없잖아요,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멀쩡하게 여기 있는 장애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세상엔 많은 형태의 장애가 있다는 걸 알려주며 나의 존재를 드러내야 이 상황이 올바르게 흘러갈까 생각하다가 그냥 입을 꾹 닫은 적이 더 많다.
아무튼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나처럼 척추측만증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나도 그렇다고, 공감해주고 싶었다. 살면서 그런 공감을 난 받아본 적이 없어서 말이다. 유일하게 위로받은 순간은 내 또래의 여자가 대학병원에서 나와 똑같은 선생님께 진료를 받고 차례로 장애 서류를 뗄 때였다.
아무튼 난 이 허리로 죽을 때까지 살아가야 하니, 오늘도 잘 살아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