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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루탈리스트 리뷰: 자유롭다는 착각

by 김원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보통 나를 닮은 영화다. 나의 외로움을 닮은 영화, 나만의 슬픔을 닮은 영화, 감추고 싶던 수치를 닮은 영화... 그런데 이 영화는 무엇이 나를 닮았길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는지 모르겠다. <브루탈리스트>는 나와 한 군데도 닮아 있는 구석이 없는 것 같다. 이 글은 이 영화가 뛰어난 이유를 열거하는 글이 아니다. 내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찾기 위한 글이다. 이 영화가 도대체 나의 어느 부분을 찔렀는지 도저히 모르겠는데 자꾸 좋은 영화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1. 자유롭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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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말했다.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절망적인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은 없다고.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간 수많은 이민자들은 결국 자유를 찾았는가. 그들은 약속의 땅에 정착해 행복한 삶을 만들어 나갔는가.


쉼터에 거주하며 무료 배식을 받던 라즐로는 해리슨의 건축 프로젝트를 따내며 비로소 경제적 자유를 얻는 듯 보인다. 해리슨이 제공한 집에서 지내며 그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를 감시하는 감리가 건축물의 설계를 제멋대로 바꿔 버리는 등 라즐로는 그의 생각조차 마음대로 펼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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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관통하는 에르제벳의 편지 속 괴테 인용구는 화살처럼 관객의 마음까지 쉽게 도달한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자유주의 국가에 살고 있지만,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돈, 항상 그놈의 돈이 문제인가 싶지만 돈만이 문제는 아니다. 내 생각엔 이 나라는 자유롭다는 착각, 그것이 문제다. 자유가 모든 것을 보장하고 제공해 주리라는 착각. 자유 위에 그 무엇도 없을 것이라는 착각.


2. 브루탈리즘 건축


영화는 마지막에 베네치아의 화려한 건축 양식을 사진처럼 보여준다. 베네치아의 광장, 성당을 비롯한 건축물의 색과 선은 화려하고 세밀한 조각이 그 화려함의 정점을 장식한다. 이것은 브루탈리즘 건축양식과 아주 다르다. 라즐리의 건축물은 차가울 정도로 단순하다. 하늘로 높게 뻗은 천장과 빛을 이용한 십자가만 중앙에 빛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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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탈리즘 건축 양식은 콘크리트의 면을 그대로 노출한다. 그 구조가 훤히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단단한 인상을 주는 것이 흥미롭다. 보통 사람 속이 훤히 보이면 약해 보이던데, 브루탈리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을 보면 마치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함이 느껴진다. 어느 세상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가치, 그 자체가 되는 듯하다.


라즐로는 해리슨이 과거 그의 건축물에 대해 물었을 때 이렇게 답한다. 그 건물들은 홀로코스트에도 여전히 그 나라, 그 도시에 건재하다고. 단단한 콘크리트처럼 어떤 가치는 그곳에 남아 시간을 견뎌낸다.


그렇다면 저절로 라즐로가 도일스타운에 짓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해리슨에게 의뢰받은 것은 마을 커뮤니티 시설이다. 대부분이 개신교인 마을 사람들의 항의와 우려에 유대인 라즐로는 건축물의 가장 높은 천장에 십자가를 뚫는다. 정오에 천장에 햇빛이 내리쬐면 신성한 십자가가 건물 안에 빛처럼 새겨진다. 그 십자가를 콘크리트로 짓지 않고 하늘에 남겨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빛은 빈 공간에만 들어올 수 있다. 십자가를 콘크리트로 지어버렸다면 십자가 아래에는 그늘만 드리웠을 테다.


3. 그래서, 너는 어디서 왔는데?


내가 영국에서 영어를 배울 때 일이다. 동네의 한 펍에 갔는데 여권을 깜빡한 날이었다. 술을 마셔야 하는 펍에서 성인임을 증명하지 못했으니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유달리 날 차갑게 대하던 시큐리티는 나에게 신경질을 내면서 말했다. “Go back to your home." 이 말을 듣자마자 심장에 납이라도 매단 듯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내 집은 분명 펍에서 20분 걸으면 있는데, 저 사람이 말하는 집은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은 가야 있는 아시아 어딘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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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얼마나 여기 적응하려 애쓰는데. 여기 사람들 심기 건들지 않으려고 얼마나 조마조마하며 다니는데. 슈퍼마켓 하나를 갈 때도 사소한 것 하나하나 검색해서 가는 걸 저들은 모를 텐데. 저 말에 돌아가는 길 내내 눈물을 참으면서 걸었다. 큰 광장을 지나야 했다. 스케이트보드를 시끄럽게 타는 10대 남학생들이 또 나를 보며 뭐라 말하며 웃었다.


몇 달짜리 유학생인 나도 이런 마음이었는데, 전쟁통에 고국을 떠나야만 하며 애써 다른 나라에 정착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지 짐작도 힘들다. 그저 순진하게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는 왜 늘 돌아갈 집이 있을 것처럼 구는 걸까. 이민자와 난민은 왜 항상 타인일 것이라고 생각하나. 누구는 태어났더니 전쟁통에 나라를 떠나야만 하고, 누구는 살다 보니 나라가 전쟁통이어서 떠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총소리는 바다를 건너지 못 하나보다. 이럴 때만 지구가 아득히 넓어 보인다.


라즐로도 비슷한 수모를 겪는다. 비교적 영어 발음이 미국인과 비슷한 에르제벳에게 남편 발음이 구두닦이 같으니 교정해 달라는 말을 농담처럼 듣는다. 버둥거리는 그들의 혀가 입술로 가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닌데.


4. 3시간 30분의 러닝타임 그리고 인터미션


벽돌책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무거운 감동이 있다. 읽기 전에는 뭐가 이렇게 두꺼울까 싶지만 마지막장까지 다 읽은 뒤에는 버릴 구석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벽돌책. 브루탈리스트는 그런 벽돌책 같은 영화였다.


인터미션이 있는 영화는 처음이었다. 인터미션동안 라즐로의 아내를 데려오기 위한 증빙 서류가 되는 가족사진이 스크린에 가득 찬다. 이 인터미션도 영화의 일부로 느껴질 수 있도록 한 것이 인상적이다. 사진 속 걱정 없이 웃고 있는 사람들의 몇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었겠고, 라즐로는 미국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아내 에르제벳은 영양실조로 인한 골다공증으로 두 다리로 걷지 못하게 되었다. 조피아는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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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넘어온 라즐로와 에르제벳, 조피아가 가족사진만큼 웃는 모습을 영화 내내 한 번도 보지를 못 했다.


5. 중요한 건 목적지이지, 과정이 아니라고.


이 영화는 ‘과정이 중요하지,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는 한가로운 격언에 정확히 반대로 서며 끝난다.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으로 영화가 시작하고 뒤집힌 십자가로 영화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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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내 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서도 그 모든 것을 납득시킨다. 그것이 일어났던 일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까. 어쩌면 세상은 똑바로 서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뒤집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뒤집힌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애써 물구나무를 서야 하는 건가. 눈에 핏발이 서고 눈물이 흐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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