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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Mar 27. 2023

이 시대에 필요한 문해력에 대한 세 가지 생각

관계, 비인간, 그리고 텍스트 중심 도그마로부터의 탈주

요즘 문해력에 대해 갖고 있는 고민들을 다소 거칠게 나누어 봅니다. 늘 그렇듯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결코 기사화되지 않는 인터뷰 답변 전문입니다. 


기자: 언어 환경이 변화한 현대사회에서 문해력의 의미는 무엇이며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김성우: 199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인터넷의 활용, 이후 모바일 통신과 소셜미디어의 활성화, 2010년대 이후 유튜브 등을 비롯한 다양한 멀티미디어 생태계의 확장은 문해력의 지형을 급격하게 바꾸고 있습니다. 여기에 2020년대에 들어 빠르게 부상하고 있는 생성 인공지능의 영향까지 가세하여 ‘글을 읽고 쓰는 능력’으로 이해되는 전통적인 문해력의 정의는 사뭇 낡은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급속한 미디어와 기술환경의 변화 속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변화에서 어떻게 뒤쳐지지 않을 수 있는지를 궁금해 합니다. 일부 문해력 담론은 ‘지금 이 기술을 배워야 생존할 수 있다’, ‘새로운 기술을 ‘장착’하지 않은 사람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등을 슬로건으로 내밉니다. 세상이 바뀌니 문해력의 구체적 양상이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격랑에 휩쓸려 가는 것이 과연 문해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유네스코에 의하면 문해력은 정보를 찾고, 소화하고, 깊이 이해하고, 이를 기반으로 무언가를 생산해 내어 적절하게 커뮤니케이션하는 능력을 포괄합니다. 그렇다면 문해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각각의 영역에 해당되는 역량을 키우고, 이를 일상과 업무에서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요? 자신의 영역에서 다양한 미디어와 기술을 통합하는 문해 역량을 키우면 그것으로 변화하는 시대가 원하는 문해력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시대에 필요한 문해력의 방향을 크게 세 차원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게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문해력의 전부라고 말씀드리고 싶진 않고요. 리터러시 연구자로서 제가 주목하는 측면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문해력의 중심을 ‘나’에서 ‘타자와의 관계’로 옮기는 것입니다. 문화연구자이자 작가이신 엄기호 선생님은 리터러시를 ‘응답하는 역량’으로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문해력의 중심을 자기 자신으로 두는 관점과는 많이 다르죠. 예를 들어 앞서서 이야기한 문해력에 숨겨진 주어는 ‘나’입니다. 내가 정보를 찾고, 내가 소화하고, 내가 이해하고, 내가 뭔가를 만들어 내가 소통하는 능력이지요. 하지만 ‘응답하는 역량’의 측면에서 보면 이런 정의가 뒤집힙니다. 저는 응용언어학을 전공하고 가르치고 있는데, 전통적 정의로 보면 ‘응용언어학 리터러시’를 어느 정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응답하는 역량’으로 생각한다면, 응용언어학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이 저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거기에 어떻게 답하느냐, 세계에 언어에 관련된 이슈가 발생할 때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고 개입하느냐, 교실에서 제가 생각하는 응용언어학 이론과는 상반되는 의견이 나왔을 때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제 리터러시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을 ‘바벨탑이 아닌 다리로서의 리터러시’라는 은유로 표현하곤 합니다. 지식과 역량을 통해 자신이 높아지고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문해 역량을 통해 자신과 타자를, 다양한 영역과 실천을 연결하는 작업에 천착하는 것입니다. 


둘째, 문해력의 중심을 ‘인간’에서 ‘비인간 존재’로, 이들의 엮임으로 옮기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문해력의 주체는 인간이었어요. 그 ‘인간’의 정점에는 서구의 비장애인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 있었고요. 이 위계에 저항하고 문해력을 모든 사람의 권리이자 향유의 도구, 평등과 민주주의의 인프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이슈로는 기후위기가 있고, 인공지능 이슈 또한 부상하고 있죠. 이 상황에서 인간만이 문해능력의 소유자라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만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동식물이, 대지가, 대기가, 그 모든 것들의 엮임이 생각하고 이해하고 있어요. 인공지능은 단지 인간의 인지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앎의 양태와 수행성을 드러내고 있고요. 이를 명확히 인식한다면 인간 중심의 문해력을 탈피할 수 있는 담론적, 교육적, 사회적 실천을 고민해야 하고, 이것이 문해력 진화의 방향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셋째, 대학에서 문해를 배우고 가르치는 우리들은 ‘텍스트 중심 문해력’이라는 일종의 도그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해력을 다양한 텍스트와 지식의 습득으로 이해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역동적이고 다양한 삶의 국면들이예요. 문해는 글을 정확하고 깊이 이해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시작되는 것이거든요. 지식이 늘어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늘어난 지식이 더 나은 삶과 사회, 그리고 더 나은 자아를 위해 어떻게 쓰여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요. 결국 문해의 다양한 영역들이 축적되고 중첩하며 충돌하는 공간으로서의 자신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비판적 성찰의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리터러시를 의심할 수 있는 리터러시, 자신의 리터러시를 정당화하는 권력을 분석할 수 있는 리터러시, 이러한 작업에 기반하여 좋은 삶을 위한 리터러시 실천을 고민하는 리터러시라고 할까요? 이것을 키워드로 정리한다면 ‘체화된 리터러시(embodied literacy)’ 혹은 ‘몸의 리터러시’라고 부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쓴 글의 일부를 가져와 보면 이렇습니다.


“이상에서 펼쳐낸 문해력에 대한 여러 논의들은 우리 각자의 몸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책을 몇 권 읽었는가, 어떤 시험에 합격했는가, 학력을 얼마나 쌓았는가 등은 문해력의 기준일 수 없다. 문해력은 우리의 몸이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가, 다른 몸과 동식물을, 대지와 바다를 어떻게 대하는가,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은 어떻게 변화하는가로 증명된다. 문해력은 숫자로 서류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마음과 세계에 새겨진다. 문해력은 결국 ‘실천하는 몸의 운동’으로, 명사가 아닌 동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획회의 573호 특집 『문해력의 모든 것』 중 <문해력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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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제가 이전에 쓴 글의 일부입니다. 참고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나가며: 문해력의 확장과 실천을 위한 일곱 가지 개념적 준거


그렇다면 앞으로의 문해력 논의는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며, 어떠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할 것인가? 필자는 크게 일곱 가지 개념적 준거를 제시한다. 여섯 가지 준거점은 문해력을 사회적, 생태적, 관계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자는 제안이다. 마지막 준거점은 다양한 논의가 결국 당도하는 지점으로서의 몸(들)의 실천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첫째, 문해력을 개인의 역량이 아닌 사회적 역량으로 바라보는 관점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문해력 습득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사람과 조직, 자원과 제도를 어떻게 배치하고 관계짓는지, 그 가운데 개개인이 어떠한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는지에 대하여 함께 고민해야 한다. 둘째, 문해력을 독립적인 수행의 영역에서 관계적 행위의 영역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말글을 생산하고 이해하는 행위는 언제나 만남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새기며, 문해는 늘 다양한 존재 ‘사이’에서, 여러 삶의 ‘틈’에서 형성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셋째, 경쟁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하는 도구로서의 문해력에서 탈피하여 윤리적 성찰에 이르게 하는 길로서의 문해력을 추구해야 한다. 다양한 미디어을 통해 소통하고 협력하며 더 좋은 세계를 짓는 것이 문해의 삶이라면,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자신을 성찰하고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넷째, 문해력의 기준을 특정한 단어와 사실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개념과 사태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는가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것도 모르다니, 문해력이 떨어지네’라는 판단보다는 ‘깊고 넓게, 무엇보다 꾸준히 배우는 모습을 보니 문해력을 갖추었네’라는 판단이 더욱 유효하다는 인식을 키워가는 것이다. 다섯째, 표준화된 점수로 문해력을 판단하기 보다는 특정한 관계와 맥락에서 드러나는 문해력에 주목해야 한다. 시험성적으로 사람들을 줄세우는 일이야말로 지극히 반문해적인 처사라는 점, 특정한 시공간과 관계, 소통의 목적을 이해하기 전에 한 사람의 문해력을 서열화하는 일은 차별과 배제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섯째, 문해의 영역을 오로지 인간에 한정하는 인간중심적 문해력 담론에서 탈피해야 한다. 인간과 기계, 미디어와 인공지능, 동식물과 대지로 이어지는 거대한 소통의 생태계 속에서 이제껏 구축되어 온 문해력이 놓쳐왔고 망쳐왔던 것은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상에서 펼쳐낸 문해력에 대한 여러 논의들은 우리 각자의 몸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책을 몇 권 읽었는가, 어떤 시험에 합격했는가, 학력을 얼마나 쌓았는가 등은 문해력의 기준일 수 없다. 문해력은 우리의 몸이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가, 다른 몸과 동식물을, 대지와 바다를 어떻게 대하는가,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은 어떻게 변화하는가로 증명된다. 문해력은 숫자로 서류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마음과 세계에 새겨진다. 문해력은 결국 ‘실천하는 몸의 운동’으로, 명사가 아닌 동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문읽기: 

https://brunch.co.kr/@literacy/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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