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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Dec 13. 2022

문해력이란 무엇인가

문해력의 개념, 내재적 논점, 확장의 준거점

(본 글은 기획회의 573호 특집 『문해력의 모든 것』에 실린 글의 '최종-1' 버전입니다.)


이 글은 세 가지 논의를 수행한다. 첫째, 문해력을 기초적인 수준에서 정의한다. 둘째, ‘문해력’이라는 개념-단어에 내재한 논점들을 살핀다. 셋째, 문해력 논의의 확장을 위한 개념적 준거점을 제시한다. 


각각의 논의는 시론적이며 결코 완결적이지 않다. 제한된 지면의 한계이자 부족한 필자의 한계이다. 하지만 문해력 개념을 탐색하며 삶을 위한 문해 실천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작은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해력: 사전적 정의에서 생각할 것들


문해력이란 무엇일까? 사전의 정의에서 시작하자. 다음사전은 문해력을 ‘文解力’이라는 한자와 함께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문해력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다면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단순히 ‘文+解+力’의 조합을 한국어로 풀이해 놓은, 다소 아쉬운 정의이다. 


그렇다면 ‘문해력’에 조응하는 영단어인 ‘literacy’는 어떨까? 영단어를 정의하는 데 가장 널리 사용되는 옥스포드 영어사전(OED; Oxford English Dictionary)는 크게 두 가지 정의를 제공한다. 첫 번째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자질, 조건 또는 상태; 읽고 쓰는 능력. 또한 특정 공동체, 지역, 기간 등에 있어 읽고 쓰는 능력이 미치는 범위”이고 두 번째는 “(대개 수식어를 동원한) 확장된 사용의 경우, 특수한 주제나 미디어를 ‘읽어내는’ 능력; 특정 영역의 역량이나 지식”이다. 


이 두 정의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 전자는 문해를 읽고 이해하는 활동으로 본다. 하지만 후자는 읽기와 쓰기를 모두 포괄한다. 둘째, 전자는 문해에 있어 특정한 조건이나 환경을 제시하지 않는다. 자연히 정의의 추상도가 상당히 높다. 하지만 후자는 공동체, 지역, 기간 등 사회문화적, 지리적, 역사적 차원을 더해 문해력을 설명한다. 여전히 추상적이지만 문해력이 터한 조건과 환경을 명시하고 있다. 셋째 전자는 문해의 대상을 ‘글’에 국한한다. 하지만 후자는 ‘특수한 주제나 미디어’를 더함으로써 문해력을 글이라는 양식(mode) 뿐 아니라 다양한 내용 영역 및 텍스트 이외의 미디어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마지막으로 전자는 문서 읽기라는 일반적 능력만을 언급하는 반면 후자는 젠더, 생태, 미디어 등 특정한 영역에서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이나 지식까지를 포함한다. 결국 ‘문해력’은 ‘literacy’의 번역어로 쓰이지만 적어도 사전의 정의에 있어서 이 둘은 상당히 다르다. 



‘문’, ‘해’, ‘력’ – 각각의 글자에 담긴 세계 혹은 논쟁


문해력을 좀 더 깊고 넓게 살펴볼 차례다. ‘문해력’을 구성하는 세 한자의 의미를 중심으로 문해력의 개념적 범위를 가늠하고 이에 관련된 주요 논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문] 우선 ‘문(文)’이다. 전통적으로 문해력은 활자 미디어 즉 텍스트를 읽고 쓰는 역량으로 이해되어 왔다. 유네스코는 문해력(literacy)을 “다양한 맥락과 연관된 인쇄 및 필기 자료를 활용하여 정보를 찾아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만들어내고, 소통하고, 계산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UNESCO, 2004; 김성우, 엄기호, 2020, p. 18).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다양한 맥락과 연관된 인쇄 및 필기자료”이다. 문해의 대상을 서류나 서적 등의 글이라고 명시한 것이다. 대표적인 영상 플랫폼인 유튜브의 2005년 출범, 모바일 통신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아이폰의 2007년 출시 이전에 나온 문해력의 정의로서,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중심 미디어로 자리잡은 책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문해 개념에 충실하다.


하지만 ‘문’이 활자매체를 의미한다는 점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유네스코의 정의가 나오기 수년 전 저명한 리터러시 학자들로 구성된 New London Group(1996)은 전통적인 텍스트 중심 문해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다중문해력(multiliteracies)”의 개념을 제안하였다. 저자들은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기술적 환경에서 텍스트와 같은 단일양식 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문해교육은 명백한 한계를 지니며, 언어, 시각, 청각, 제스처, 공간 등의 의미 디자인 요소를 포함한 다중양식(multimodal) 의미생성을 교육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리터러시 교육학술단체인 국제 리터러시 협회(ILA; International Literacy Association)가 현재 사용하는 정의와 맞닿아 있다. ILA는 리터러시를 "다양한 분야와 맥락에서 시각, 청각 및 디지털 자료를 사용하여 찾아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만들어내고, 계산하며, 소통하는 역량"으로 정의한다 (International Literacy Association, 2022). 이 정의는 유네스코의 정의와 여러 역량을 공유하지만 매체에 있어서만큼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시각, 청각, 디지털자료”를 모두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해력의 정의에 글뿐 아니라 음성언어 및 디지털 자료를 명시함으로써, 문해의 대상은 사실상 거의 모든 매체로 확장된다.


이상의 논의에서 몇 가지 논점이 드러난다. 첫째, ‘문해교육의 중심은 여전히 글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다양한 매체가 교육에 적극적으로 통합되고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이 확대되고 있지만, 중고교를 지나 고등교육으로 갈수록 텍스트 중심의 교육의 위상은 강고하다. 학생들의 생활세계는 동영상, 웹툰, 게임, 웹소설, 밈(짤), ‘숏폼 콘텐츠’ 등으로 채워지고 있지만 이는 ‘교육의 언어’가 되지는 못 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다중문해력 교육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이와 관련된 교육과정 및 수업체계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현장 교사들의 훌륭한 실천사례들이 있지만, 이를 사회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어떤 주체들이 어떤 방식으로 협업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의가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다중문해력의 발달을 도모하기 위해 텍스트와 다른 미디어들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엮어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게임은 도서관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밈은 언어교육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는가?’, ‘숏폼 콘텐츠 제작은 평가에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가?’ 등의 과감한 상상 속에서 문해교육을 지평을 넓히는 작업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해] 다음은 ‘해(解)’를 살펴보자. 글을 비롯한 다양한 미디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가장 손쉬운 대답은 ‘표준화 평가 문제를 올바르게 풀었을 경우 해당 자료를 이해한 것으로 판단한다’가 될 것이다. 공인된 문해력 평가 점수를 ‘해’의 증거로 삼는 방식이다. 


아마도 한국사회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평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Program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일 것이다. 평가의 세 영역인 읽기, 수학, 과학 가운데 읽기점수가 문해력의 주요 지표로 활용된다. 15세 청소년의 역량을 측정하는 PISA가 전체 연령을 대표하거나 직업 수행을 위해 필요한 문해력까지 포괄할 수는 없기에,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 Programme for the International Assessment of Adult Competencies)라는 별도의 평가를 운영한다. 이들 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문해력이 높은 것으로, 그렇지 못 하면 문해력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된다. (PISA와 PIAAC 점수 해석 시 주의점에 관해서는 김성우(2021)을 참고하라.)


표준화 시험의 점수가 ‘해’의 한 축일 수는 있겠으나 ‘문해력’의 일상적 용례와는 거리가 있다. 소위 ‘문해력 떨어지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판단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는 것은 의사소통의 실패 경험이다. PISA 등의 표준화 점수로 자신과 타인의 문해력을 판단하지는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해’에 대한 사뭇 다른 층위의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육 및 언론은 대개 표준화 시험의 결과를 인용하며 문해력의 문제를 진단하지만, 일상에서 ‘문해력’이라는 단어는 특정한 상황에서 상대가 ‘당연히 이해해야 할 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동원된다. 즉, 깊이 있는 토론이나 중장기 작업의 과정에서 관찰되는 다면적 이해를 논하기 보다는 특정한 단어 한두 개에 대한 단편적 지식을 갖고 있느냐를 문제삼는 것이다. 


여기서 ‘해’를 둘러싼 논의의 두 축 모두에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해력을 표준화 시험 점수로 이해할 경우 삶의 다양다종한 관계와 상황을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 반대로 문해력을 일상의 언어사용에 대한 주관적 판단의 도구로 동원할 경우, ‘문해력’이라는 기표가 갖는 사회문화적, 개념적 가치가 땅에 떨어진다. ‘문해력’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반문해적인 행위를 수행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기에 추상화되고 표준화된 문해력과 일화적(episodic) 경험에 기반하여 판단되는 문해력 모두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문해력을 시험 안에 가둘 수 없는,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발현되는 역량이라고 이해한다면, 몇 개의 숫자로 그 총체를 말할 수도, 한두 단어에 대한 지식으로 손쉽게 환원할 수도 없다. 결국 ‘해’는 글과 말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 사건의 흐름, 대화 상대의 의도, 상황의 다양한 측면, 제도와 권력의 영향력 등을 다각도로 살피는 일로 이해되어야 한다. 


[력] 마지막으로 ‘력(力)’을 둘러싼 논점이다. 일반적으로 문해력은 개인의 역량으로 인식된다. 개인이 교육을 받고, 책을 읽고, 다양한 미디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쌓아 성취하는 능력인 것이다. 이는 평가에서 얼마나 높은 점수를 받았는지로 ‘해’를 판단하는 관행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자연히 많은 이들은 ‘시험 문해력’에 최적화된 문해 활동에 매진한다. 이 과정에서 문해력의 습득은 개인의 책임이 된다. 아울러 높은 시험 문해력은 높은 대인적, 사회문화적 역량으로 포장되고 오인된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문해 역량을 정의할 수도 있다. 첫째, 문해를 수반하는 다양한 상황에서 유연하게 관계를 맺고 협상과 논의를 거쳐 필요한 과업을 수행하는 관계적 역량으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개인에 내재하는 문해 역량은 상호 관계를 짓는 역량으로 재개념화된다. 문해력은 개인의 머리속에 쌓여 있는 정적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역동적 실천이다. 둘째, 이를 조금 확장하여 공동체와 조직의 역량을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문해력은 개인에게 귀속된 역량이 아니라 특정 공동체와 조직에 분산되어 있고(distributed), 상황에 따라 새롭게 조합되며(assembled), 구성원들의 문해력 발달과 전인적 성장을 돕는 집단의 역량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역량으로서의 문해력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다양한 지적, 문화적, 경제적 자원과 재능을 배치하여 다양한 종류의 문해력이 서로 만날 수 있게 하고, 상호의 이해와 공감을 촉진하며, 이를 통해 사회경제적,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의 역량이다. 



나가며: 문해력의 확장과 실천을 위한 일곱 가지 개념적 준거


그렇다면 앞으로의 문해력 논의는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며, 어떠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할 것인가? 필자는 크게 일곱 가지 개념적 준거를 제시한다. 여섯 가지 준거점은 문해력을 사회적, 생태적, 관계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자는 제안이다. 마지막 준거점은 다양한 논의가 결국 당도하는 지점으로서의 몸(들)의 실천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첫째, 문해력을 개인의 역량이 아닌 사회적 역량으로 바라보는 관점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문해력 습득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사람과 조직, 자원과 제도를 어떻게 배치하고 관계짓는지, 그 가운데 개개인이 어떠한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는지에 대하여 함께 고민해야 한다. 둘째, 문해력을 독립적인 수행의 영역에서 관계적 행위의 영역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말글을 생산하고 이해하는 행위는 언제나 만남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새기며, 문해는 늘 다양한 존재 ‘사이’에서, 여러 삶의 ‘틈’에서 형성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셋째, 경쟁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하는 도구로서의 문해력에서 탈피하여 윤리적 성찰에 이르게 하는 길로서의 문해력을 추구해야 한다. 다양한 미디어을 통해 소통하고 협력하며 더 좋은 세계를 짓는 것이 문해의 삶이라면,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자신을 성찰하고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넷째, 문해력의 기준을 특정한 단어와 사실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개념과 사태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는가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것도 모르다니, 문해력이 떨어지네’라는 판단보다는 ‘깊고 넓게, 무엇보다 꾸준히 배우는 모습을 보니 문해력을 갖추었네’라는 판단이 더욱 유효하다는 인식을 키워가는 것이다. 다섯째, 표준화된 점수로 문해력을 판단하기 보다는 특정한 관계와 맥락에서 드러나는 문해력에 주목해야 한다. 시험성적으로 사람들을 줄세우는 일이야말로 지극히 반문해적인 처사라는 점, 특정한 시공간과 관계, 소통의 목적을 이해하기 전에 한 사람의 문해력을 서열화하는 일은 차별과 배제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섯째, 문해의 영역을 오로지 인간에 한정하는 인간중심적 문해력 담론에서 탈피해야 한다. 인간과 기계, 미디어와 인공지능, 동식물과 대지로 이어지는 거대한 소통의 생태계 속에서 이제껏 구축되어 온 문해력이 놓쳐왔고 망쳐왔던 것은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상에서 펼쳐낸 문해력에 대한 여러 논의들은 우리 각자의 몸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책을 몇 권 읽었는가, 어떤 시험에 합격했는가, 학력을 얼마나 쌓았는가 등은 문해력의 기준일 수 없다. 문해력은 우리의 몸이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가, 다른 몸과 동식물을, 대지와 바다를 어떻게 대하는가,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은 어떻게 변화하는가로 증명된다. 문해력은 숫자로 서류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마음과 세계에 새겨진다. 문해력은 결국 ‘실천하는 몸의 운동’으로, 명사가 아닌 동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김성우, 엄기호. (2020).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따비. 

김성우. (2021). 읽고 쓴다는 것의 새로운 의미. 여주세종문화재단(엮은이), 한글 문해력 민주주의, 64-82쪽. 가갸날. 

International Literacy Association. (2022). Literacy. Literacy Glossary. Retrieved from https://www.literacyworldwide.org/get-resources/literacy-glossary 

New London Group. (1996). A pedagogy of multiliteracies: Designing social futures. Harvard Educational Review, 66(1), 60-92.

UNESCO. (2004). The plurality of literacy and its implications for policies and programs. UNESCO Education Sector Position Paper,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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