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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Dec 11. 2022

논리, 이야기, 그리고 아이러니

유이월 짧은 소설집, <찬란한 타인들>. (자유문방, 2022) 

1. 인지혁명을 대표하는 심리학자 중 하나인 제롬 브루너는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는 패러다임적 사고입니다.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사고, 세계를 범주로 나누고 이들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사고입니다. 이는 형식적, 수학적 체계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과학적 개념 체계'라고 부르는 결과로 이어지지요. 


두 번째는 '내러티브적 사고'입니다. 말 그대로 이야기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련의 인물 혹은 요인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긴장과 갈등, 협력 속에서 관계를 변화시켜 나갑니다. 과거를 반추하거나 인생의 여정을 돌아볼 때, 상상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우리는 내러티브 모드로 사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유이월 작가의 <찬란한 타인들>을 읽으면서 내내 세 번째 방식을 생각했습니다. '아이러니 모드'라고 부르고 싶은 사고입니다. 인생은 과학적 인과 및 상관관계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시간의 축을 따라 흐르는 내러티브로 포착되지 않는 수많은 '틈'이 '현실 밖에서' 수시로 생성됩니다. 인간은 물리적 실재로 환원되지 않는 감정과 기억, 상상과 회상을 계속해서 만들어 냅니다. 그들은 쉽게 조화하지 않으며 완벽한 갈등 상태에 머무르지도 않습니다. 한 차원에서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다른 차원에 진입하게 되면서 만나보지 못 한 타인이 되기도 하고, 아무런 교류 없이 지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어느 장소에 우연히 존재하게 되면서 운명적 관계로 맺어지기도 합니다. 



3. 작은 고백을 하나 해야겠습니다. 수십 년 전 유이월 작가의 글을 처음 접했을 때 많이 부러웠습니다. 부러움이라는 감정에 어지간히 무딘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제가 뭘 잘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러워한다고 될 일은 하나도 없다는, 나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 몸뚱아리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체념, 혹은 '객관적' 인식 때문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문장이 샘났던 이유를 깊이 헤아려 볼 생각은 못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소설집을 읽고, 작가의 말을 읽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이러니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4.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러니는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그 공간에 아무런 힘도 가하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인 만큼 자연스럽게 허물어지도록."


"바다를 보러 온 사람들은 대체로 좋아 보인다. 쓸쓸함이나 괴로움 때문에 바다를 찾아온 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의 뒷모습에는 그 쓸쓸함과 괴로움을 적극적으로 누린다거나 달콤하게 증폭시키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다." 


"찰스는 더 묻지 않았다. 모든 디테일을 알아도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로렌의 서투름은 나아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 본질과도 같은 것이었다. 서투를 때 가장 빛이 나는, 그런 유의. 연습이 거듭될수록 그녀는 자신의 빛과 멀어졌고..."


"자기 삶에 만족한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수많은 불일치의 요소들을 우연히 일치시킬 수 있었을 때, 혹은 그것들을 방치하기로 완전히 결정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5. 아무런 힘도 가하지 않는 데는 얼마나 힘이 들까요. 괴로움이 풍경 속 뒷모습이 될 때에도 괴롭기만 할 것일까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요. 서투름을 개선함으로서 삶에 능숙해질 수 있을까요. '만족한다'고 능동의 언어를 사용해 자신있게 말하는 인간은 그 순간 얼마나 많은 우연들이 동시에 일치되고 있는지 인지할 수 있을까요. 순수한 논리적 차원에서, 시간의 자연스런 흐름에서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요? 살아있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과 같고, 이해는 오해를 망각하는 일이며, '내가~했어'라고 말하는 순간 존재의 근원을 깡그리 무시할 수밖에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데도요? 우리가 서로를 위로하고 환대하며 사랑하는 게 가당킨/가능하긴 한 걸까요? 


6. 이렇듯 아이러니의 세계는 설명을 비틀고, 시간을 뒤집고, 의지를 의심하고, 기억을 헤집고, 풍경과 사람을 엮어냅니다. 아이러니로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쩌다 한두 번 아이러니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삶의 기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아이러니에 대해 깊이, 얕게, 오래, 순간순간, 차분하게, 정신없이, 홀로, 타인과 함께, 만족과 불행을 수없이 오가고 타자와 자신을 수시로 바꿔가는 이에게만 허락되는 세계일 겁니다. <찬란한 타인들>은 그런 세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김해 경전철에서 <찬란한 타인들>을 읽었다.


7. 처음엔 다분히 분석적인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메타포를 오랜 시간 공부해 온 저에게 유이월 작가의 비유는 찬탄의 대상이었거든요. '~같이', '~듯', '~처럼'과 같은 직유는 웬만하면 쓰지 말라고 하지만, 그의 글에서 만나는 직유들은 두 대상을 덧대어 못질한 어설픈 짜깁기가 아니라 두 종류의 실을 정교하게 직조한 테이블보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읽어가면서 깨달았습니다. 직유를 분석해서 아이러니의 세계에 닿을 수는 없다는 것을요.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이 글은 별 논리도 없고 방향도 없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8. 마지막으로 유이월 작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오랜 시간 아이러니를 붙잡고 씨름해 주어서, 언어의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한계라는 언어 자체가 아이러니의 산물임을 꿰뚫어 봐 주어서, 수만 겹 삶의 결을 쉬이 깎아내려 들지 않아서. 무엇보다 <찬란한 타인들>을 통해 타인의 찬란함, 아이러니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 주어서. 


9.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의 말에 따르면, "우연, 운명, 운, 숙명, 워낙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 어떤 것이 정확한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순전히 아이러니로 이루어진 것이다." 텍사스 루이스빌의 집 앞 호숫가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내가 받아들여야 했던 숙명과 내가 닿았던 우연이 빚어낸 그 시간들 속에서 아이러니가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생의 아이러니에 대해 줄곧 생각했고, 밀쳐 내거나 거부했던 많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p.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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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계속 좋은 글 써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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