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부터 간호사라는 직업에서 빗겨 선 느낌을 갖고 살았다. 간호학을 전공하고, 국가고시를 보고, 남들이 간호사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모든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간호사 자아는 애매하게 겉돌 뿐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며 휴학했지만 딱히 다른 수가 없어 돌아온 복학생의 마음가짐. 사명감도, 애착도 없는 직업. 면허가 있으니 굶어 죽지는 않겠거니 하는 믿음. 그 정도가 내게 이 직업의 의미였다.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지 병원에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버텼다. 철저히 돈벌이 수단으로써의 직업은 많은 것을 참고 넘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한 가지만 빼고.
아주 바빴던 어느 날, 환자 침대를 옮기다 이동 침대 바퀴에 발가락이 깔렸다. 욱신거리는 감각을 견디며 일을 마치고 엑스레이를 찍었다. 정형외과 의사는 새끼발가락에 금이 가 있다고 이야기해 주며, 필요하면 진단서를 써 주겠다고 덧붙였다. 다음 날 발끝부터 정강이까지 반깁스를 둘둘 감고 출근한 나를 수선생님은 면담실로 불렀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가며 내게 원래 근무표대로 출근해 줄 수 있을지 물었다. 미치도록 바쁜 시기였다. 누군가가 병가를 들어가면 누군가는 휴가를 반납하고 출근해야 했다. 잠깐 사이에 마음 불편하게 집에 누워서 뼈가 붙기를 기다리느니 반깁스를 질질 끌며 일하고 동정표를 받는 것이 낫겠다는 계산이 섰다. 나는 수선생님께 딱 병가를 내기 직전까지만 아파 아쉽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포기는 익숙했다. 그나마 곧 예정된 휴가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휴가 전날, 다시 면담실로 불리기 전까지는.
“영화야, 정은 선생님이 병가를 받았어. 그래서 내일부터 예정되어 있던 휴가는 어려울 것 같아……”
아직도 눈을 감으면 얼굴이 생생히 떠오르는 정은 선생님. 그녀는 내게 태움이 뭔지 알게 해준 선배 간호사였다. 얼마 전부터 손목이 아프다며 여기저기 이야기하고 다니더니 작정하고 진단서를 떼온 모양이었다. 상급자가 병가를 거부하면 노조에서 문제로 삼을 수 있었기에, 당사자에게 간곡히 부탁해 3주의 병가를 2주로 줄인 것이 수간호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소식을 전하는 수선생님의 얼굴은 거의 잿빛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을 하고 면담실을 나왔다. 같이 근무한 선배들이 퇴근을 준비하는지 탈의실이 시끄러웠다. 나는 사람들을 피해 아무도 없는 회복실 구석에 커튼을 치고 빈 침대에 앉았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병원 입사를 결심하면서 나는 많은 것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선배의 태움은 각오했던 일이었다. 교수가 내뱉는 인격 모독도 예상안에 있었다. 환자들의 아가씨 소리와 성희롱도 모른 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회가 간호사를 대접하는 방식이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은 견딜 수 없었다.
이 체계는 아주 공고하게 짜여져, 개인의 희생과 포기를 꾸준히 집어삼켜야 유지될 수 있었다. 간호사는 태움, 인격모독, 성희롱에 그치지 않고 더 많은 포기를 제물로 바쳐야 했다. 구성원에게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게 만들고, 당연한 권리를 취하는 자는 미움을 사게 했다.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은 병원에 남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도망쳤다. 어두운 회복실 빈 침대에 앉아 꺼이꺼이 울면서 나는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도망친 자의 부채감 때문일까. 의료 현장의 문제의식에 대해 목소리 내는 간호사나 현장에 남아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하는 간호사에 대한 이야기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하지만 부채감이라고 꼭 아름답게 승화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팬데믹의 한복판을 지나면서, 각종 매체를 선두로 온 국민이 방호복을 입고 땀에 절여진 간호사의 희생을 돌림노래로 추앙하는 것을 지켜보며 내가 한 생각은 이랬다.
‘어차피 니네 이거 다 말뿐이잖아.’
물론 이딴 불경스러운 생각에 스스로 놀라 허겁지겁 의료진의 숭고한 희생에 대한 존경심을 곱빼기로 넉넉히 태워 넣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간호사들의 희생은 눈물겨웠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들의 처우는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여러 명의 어린 간호사가 죽음을 택했을 때도, 태움 문화를 비롯한 병원의 악습이 재조명될 때도 그래왔으니까. 병원 밖에서 말로만 하는 추앙, 말로만 하는 지적은 참 쉬웠다. 나는 지금까지 병원에 남아있는 간호사들은 어떤 마음으로 현장을 지키고 있을지 자주 궁금했다. 도망친 자가 어떻게 감히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의 끝은 항상 그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으로 끝났다.
냉소적인 시선 반대편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선생님에게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인 병원에서 선생님은 굳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었다. 눈치가 보여 초과근무 수당을 신청하지 않는 간호사들에게 실 근무 시간을 입력하도록 독려했고, 병동 규모에 맞게 간호 인력을 증원해야 한다며 간호부와 싸웠다. 교육 전담 간호사나 야간 근무 전담제 같은 시범 사업은 꼼꼼히 검토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결단력 있게 밀어붙였다. 변화를 싫어하는 간호사들은 수간호사가 귀찮게 할 때마다 볼멘소리를 냈지만, 새로운 제도의 이점을 체험하고 나면 높은 만족도와 낮은 퇴사율로 화답했다. 선생님께 병원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나는 “선생님 같은 분이 병원에 있어서 다행이에요.”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그때마다 지난주에도 간호 부장에게 호출당했다며, 나는 이미 늦어 어쩔 수 없고 병원을 나간 네가 승리자라고 하셨지만. 여러 해 동안 수선생님을 지켜보며 나는 나의 냉소가 정당한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진짜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어떤 힘일까.
연일 뉴스에서 간호법이 헤드라이너로 등장했다. 어렵사리 국회를 통과한 간호법에 대해 대통령은 거부권을 고려하고 있었다. 대한간호협회는 드디어 협회비 값을 하려는 것인지 준법투쟁을 선언하고, 면허 외 불법 업무 지시를 거부한다는 성명을 냈다. 핸드폰을 열어보면 이런 사람이 있었지, 싶게 가물가물한 선 후배 동기들의 프로필 사진이 ‘준법투쟁 간호법 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선생님은 최근에 다녀온 시위 사진을 공유해 주시는 것으로 근황을 전했다. 사진 속에 낯익은 병원 사람들이 ‘간호법’이라고 적힌 민트색 손피켓을 들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께 다음 집회가 잡히면 일정을 공유해 달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이 간호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한동안 쏟아지는 뉴스로 마음이 시끄러웠다. 사람들은 간호법 보다 대통령의 두 번째 거부권 행사 자체에 더 관심을 두는 듯했고, 간호법은 재의결 되지 못한 채 조용히 폐기 수순을 밟았다. 간협은 준법투쟁을 지속하고 면허 반납 운동을 했지만 이미 화제는 다른 곳으로 옮아가기 시작했다. 그놈의 존재감도 없는 준법투쟁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걸까. 간협이 말한 수준의 투쟁이라면 당장 모든 병원 업무가 마비되어야 하는데, 세상은 너무나 태연했다. 나는 수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간협에서 하고 있다는 준법투쟁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이게 병원에서 가능하긴 한가요. 예상대로, 간호사들은 딱 병원이 돌아갈 만큼의 투쟁을 하고 있었다. 병원장과 대단하신 교수님들을 거슬리게 하지 않을 만큼의 조심스러운 투쟁. 그것이 피고용자이면서 사명감이 있는 간호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한발 물러서야 하는 쪽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게 무슨 투쟁이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이 새끼들, 어차피 다 말뿐이라니까요!”
도망친 자가 남은 자에게 외쳤다. '이 새끼들'은 이제 누구를 향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