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가 돼서야 말하는
나답다는 말을 요 근래 자주 말하곤 한다. 나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의식적으로 내뱉는 말이기도 하다. 나 스스로에 대한 선언 같은 거랄까. 주름이 잔뜩 진 와이셔츠, 젓가락으로 떠먹는 예쁜 주문제작 케이크, 한참 전에 깨진 휴대폰 필름 액정, 수없이 열린 휴대폰의 팝업창. 누군가는 털털하다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섬세하지 못하다 했다.
그들의 해석과 다르게 난 스스로를 누우면 자리가 꺼져버리는 메모리폼 매트리스처럼, 툭 찌르면 그 자리 그대로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라 여겼다. 작은 변화에 크게 동요했고 서투른 실수에 심하게 자책했다. 행운처럼 날아오는 기회는 없단 걸 어린 나이에 알아버려서 계획과 다른 선택지엔 날 선 행동으로 대응하곤 했다. 작은 선택의 순간들이 쌓여 지금 내가 만들어졌고, 크고 작은 실패와 성공을 이뤄낸 20대는 마침표를 찍었다. 앞으로 나의 30대는 어떤 모습일까.
이생망이라고 들어보았는가. 2030년 세대에서 유행처럼 번진 말로, '이번생은 망했어' 라며 본인 태생을 희화화하는 웃픈 신조어라고 한다. 잘난 것들은 본디 타고났으며, 난 멋진 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했으니 '어차피 안돼'라고 희망조차 포기해 버리는 것. 슬프면서 웃기고, 리얼하게 현실적이라 아프기까지 하다. k 현실고증이라 하던가.
아등바등 살아내서 취업하고 한 푼 두 푼 적금해서 서울과 거리가 아득하게 먼 도시에 전세 하나 구하기 힘든 현실과 대비되는 '그사세' 의 삶. 인스타그램 너머 손쉽게 볼 수 있는 세상에 노출돼 있어 내 인생이 더욱 가엾이 여겨진다. 사실 난 '편하긴 하겠다.' 그 이상 그 이하의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전지현의 외모를 시기하고 부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너무 거리감이 들면 오히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애매하게 가지고 태어났다면 욕심낼 것들도 더 많아질 텐데. 그들에게는 탑재되지 않은 내려놓음 기능을 가지고 태어난 기분이랄까. 출발점이 다르면 어떠한가. 출발과 끝 사이엔 수많은 선택과 기회가 있음을 나는 알고 있는 걸.
이생망이라고 외치는 일은 내 인생의 종착역이 여기까지라고 간절히 선언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내 삶이 여기서 시작했으니, 여기서 끝내리라. 어느 조선시대 충신들의 굳은 결기 같이 느껴지는데, 그 얼을 이어가기엔 우리는 꽤 자유로운 영혼들이 아닌가. 진짜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내가 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부터 시작된다라고 믿는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것이다.
지난해 신당역 역무원 살인 사건이 문득 떠오른다. 20대 여성, 공기업 직원이라는 직업. 너무나 평범한 그녀였기에 나 또는 내 주위 누군가의 얘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더 기억에 남았다.
대학 4년 동안 과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그녀는 졸업 후 바로 공기업에 취업을 해서 집안의 자랑거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가해자 전 모 씨의 신상과 얼굴이 공개가 되자 나타난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그의 멀쩡한 외모와 공인 회계사 합격 이력 때문이었다. 저런 사람이 무슨 이유로 그랬을까?라는 오지랖 넓은 관심과 더불어 저렇게 괜찮은 사람도 여자가 싫다잖아요~라는 회사 직원의 말에 반사적으로 오른쪽 눈썹이 구겨졌었다. 가족들은 사랑하는 딸과 조카를 잃었다.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 맞을까.
인생의 '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공포심에 휩싸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삶이 끝나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끝이라는 게 있는 걸까. 운전하는 도중, 달리는 버스 안에도, 심지어 그냥 길을 걷는 중에도 어느 순간에도 사고란 것은 일어날 수 있는 거고, 그렇다면 언제든 내 인생이 끝날 수 있다는 건데 마지막 순간에 후회 없이 살았다 할 수 있을까. 다음 날 아침 신문기사의 한 줄이 되어 '안타까운 일이네' 커피 한 모금과 함께 흘러가게 되는 인생이 되는 건 아닐까. 그녀가 열심히 살아온 삶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어디에서 보상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걸까.
모든 일에는 끝이 있고 최후의 순간 후회 없이 살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기준은 결국 나로부터 나온다. 번듯한 직장, 든든한 통장의 잔고, 내가 올린 스토리의 좋아요의 수, 내 장례식장에 진심으로 슬퍼해줄 사람의 수 남들이 보기에도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 말고,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그 무언가. 그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이고 그 걸 찾았다면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나답게, 나답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의 20대는 나다움을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나다움을 찾는다는 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난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삶을 지겨워하면서도 쳇바퀴 안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쉬이 불안함을 느꼈고 모든 문제를 내 안에서 찾았다. 이런 나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헬요일 있어야 주말이 기다려지듯, 흔들리는 시간이 있어야 안정적인 삶에 감사함을 느낄 수도 있는 것.
어느 날이었다. 남자친구에게 "나는 나이가 들수록 내 모습을 좋아하게 될 것 같아"라고 뜬금없이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답했다.
"내가 근래 들어온 말 중에 가장 좋은 말이네"
사소한 순간에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지금,
사소한 순간에 행복한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도 감사하다.
가슴 한 구석 나만의 무언가를 품고 살아가는 30대가 되기를.
최선의 삶을 향한 당신의 열망이 커질수록 세상의 밝은 면들이 드러난다면 기분이 어떨까? 최선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고 알아갈수록 더 많은 가능성과 장점을 발견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렇다고 바라기만 하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것은 해석하기 나름일 뿐이고,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도 아니다. 세상은 나름의 구조와 한계를 지닌 채 여전히 그대로 존재한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살면 우리는 세상의 도움을 받거나 세상에 배신을 당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결말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세상과 함께 춤을 추려고 한다면 춤을 출 수 있다.
- 12가지 인생의 법칙: 혼돈의 해독제 / jorden B. Peter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