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다 싶어 떠난, 울산의 봄
여행을 갈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멀리는 아니더라도 어서 떠나고 싶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 상황이 '여행이나 떠날 때'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꽃이 피는 4월, 새 봄을 맞아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나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최선을 다해 먹고사는 중이었다.
이제 서둘러 새롭게 먹고살 궁리를 해도 늦었다는 소리를 들을 그런 상황.
하지만 나는 잠시나마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기차표를 끊었다.
물론 떠나기 전날 면접을 봤고, 연락은 오지 않았다.
덕분에 혹시라도 여행 중에 연락이 오면 어쩌지? 출근하라고 하면 어떡하지?
... 했던 설레발 걱정은 말끔히 씻어버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불행 중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사실 제일가고 싶었던 여행지를 가기에는 돈도 시간도 부족했다.
그래도 늘 마음에 품고 있던 곳이 있었다.
'언젠간 꼭 가고 만다'는 아니었어도 '언젠간 가봐야지'하고 생각했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그런 곳.
특별한 여행지도 아니고 명확한 이유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가보고 싶었던 곳, 울산이었다.
그동안 살면서 울산이 고향이라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마주쳤다.
내가 만난 울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좋아했다.
물론 서울에 올라와서 지내는 사람들이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러고 보면 유독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 없는 건 서울 사람들뿐인 것 같다.
울산은 관광지라기보다는 공업도시 이미지가 컸고,
대부분 부산 여행을 가면서 하루 정도 거쳐가는 곳이었다.
어쩌면 생뚱맞은 여행지였고, 생뚱맞게 여행이나 떠나는 내 상황과 잘 맞는 것 같았다.
게다가 여행으로서는 1박도 잘 안 하는 이곳에서 3박이나 했으니 말이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태화강 공원이었다.
한강 공원이나 일산 호수 공원처럼 어쩌면 그냥 '울산에 있는 공원'일뿐인데,
이상하게 나는 이곳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울산은 지하철이 없는 대신 버스로 웬만한 곳은 다 둘러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울산에 있는 동안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이동하면서 나는 태화강을 지나쳤다.
그리고 내가 태화강 공원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 십리대밭.
울산이 고향인 친구는 내게 태화강을 이야기하면서 십리대밭을 좋아할 것 같다고 했고,
역시나 고향 사람 말을 듣는 게 백 번 옳았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태화강 공원 한쪽에는 대나무가 숨을 쉬는 긴 십리대밭길이 있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강이 보이고 고층 건물과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이곳에,
십리대밭은 꼭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곳이었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워낙 넓어서인지 조용하고 한산했고,
걷다 보면 아무도 없는 울창한 숲 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길고 긴 십리대밭길을 한참 걷고 나서 빠져나와도, 태화강은 끝없이 이어졌다.
맑고 청아한 봄 날씨에 나물을 캐러 나온 아주머니들도 보였고,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하며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는 왜 서울이 아닌 걸까.
물론 여기가 서울이었다면 지금 나는 이곳에 없었겠지.
그리고 태화강에서 학성교로 이어지는 곳으로 걷다 보면
황홀한 '유채꽃'밭을 만나게 된다.
울산 여행 다음으로 갔던 순천의 순천만정원이나, 유명한 제주도에 비하면 작은 규모이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태화강 유채꽃밭이 더욱 빛나는 것 같다.
태화강의 봄은 정말 아름답다.
모든 걱정들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저녁이 되면서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나면 태화강은 또 다른 풍경이 된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태화강은 야경이 정말 멋있다고들 하는데, 나는 일몰 직전의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다웠다.
전부터 나는 일출보다는 일몰을 감상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게을러서 아침에 못 일어나는 것을 합리화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기는 하는데,
어쨌든 굳이 일출을 보려고 애쓰는 편은 아니었다.
1월 1일만 되면 일출을 보러 떠나는 많은 사람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해는 항상 뜨는데...
그렇게 치면 해는 항상 지는데, 난 왜 일몰을 보는 게 좋은 걸까?
사람들은 일출을 보며 새로운 다짐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나는 일몰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세상의 모든 것이 하찮지 않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풍경들이, 지금 이 시간들이,
모두 헛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
누군가에게 '오늘 하루도 정말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어 지는 기분.
그래서 일몰을 보는 것이 좋고, 그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바다를 가기로 한 울산에서의 마지막 날은 비가 내렸다.
새벽부터 비가 조금 내리다 그친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이미 전날 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산은 샀지만 늦잠을 잤다.
늦은 아침 우산을 쓰고 나서 1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일산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바다에 도착하고 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봄바다'는 처음이고 낯설었다.
여름바다는 당연한 것이고, 가을바다나 겨울바다도 꽤 익숙한 것이다.
하지만 봄바다는 내게 새로운 것이었다.
날씨가 흐렸기 때문인 까닭도 있겠지만 봄의 바다는 한적했다.
아주 드물게 모래사장을 걷는 사람이 있었고, 낚시를 하는 아저씨 한두 사람이 보일 뿐이었다.
여름이 되면 이곳은 사람들로 가득 차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지금 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인적 드문 봄 바다의 파도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그리고 한참 후, 울산시티투어 버스에서 내린 무리의 요란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아직 관광도시라고 하기에는 낯설지만 울산도 시티투어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그 버스를 타면 태화강과 바다는 물론이고 울산의 명소라는 곳을 한 번에 다 둘러볼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나는 3박을 해가며 울산의 이곳저곳을 또 걷고 있었다.
여행을 목적으로 울산에 와서 3박이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드는 생각은 오래 있기를 잘했다는 거다.
울산의 명소로 꼽히는 대왕암을 가려면, 내가 알게 된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일산해수욕장에서 이어지는 산책로를 통해 가는 방법과
둘째, 대왕암 입구에서부터 직접 오르는 방법.
별다른 계획표 없이 울산여행 후기를 올린 블로거들의 글만 열심히 보고 떠났던 나는,
울산여행 둘째 날 두 번째 방법(대왕암 입구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직접 올라가는)으로 대왕암을 찾았다.
꽤나 걸어가야 하지만, 내가 찾은 그날은 딱 벚꽃이 수놓은 시기였고 정신없이 꽃을 감상하느라
전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왕암 그 자체보다 오히려 향하는 그 길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을 정도다.
여행 3일 차, 일산해수욕장에 간 나는 이미 찾은 대왕암은 다시 찾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바다 앞 카페에 들어갔다가 대왕암으로 연결되는 산책로를 발견했고,
갑자기 가기로 마음먹은 '슬도' 역시 이곳에서부터 대왕암을 거쳐 갈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역시나 여행의 묘미는 예측 불가능, 즉흥적 결정, 무계획이 계획 아닐까.
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대왕암을 두 번이나 찾은 셈이다.
물론 처음엔 대왕암 그 자체가 '목적'이었고, 두 번째는 통로 '수단'이었기 때문에 느낌이 전혀 달랐다.
내가 살아갈 날들도 마찬가지겠지?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상황도, 생각도, 행동도 달라지게 되겠지.
대왕암은 듣던 대로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흐린 날씨에도 웅장한 바위와 파도소리는 선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 대왕암의 끝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르며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생각보다 금방 오를 수 있고, 울산 시내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아올 수 있어서
울산에서는 이미 유명한 관광지로 자리매김한 것 같았다.
대왕암은 해가 지면 훨씬 좋은 곳이다.
다리에도 불이 켜지고, 봄에는 벚꽃 야경도 실컷 감상할 수 있기 때문.
시끌벅적한 다리 부근과는 달리 뒤쪽 산책로로 향하면
조용한 곳에서 파도 소리와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더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울산 여행 셋째 날, 일산해수욕장과 대왕암을 거쳐 슬도로 가는 길.
바다를 실컷 보고 싶은 날은 아예 이렇게 세 곳을 한꺼번에 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원래 처음부터 가기로 계획한 곳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이끌려 어느새 나는 슬도로 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딜 가든 항상 섬을 좋아했고, 결국 여행의 목적지이자 종착지는 섬이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슬도에 가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고, 별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곳에 가면서 좀 충격을 받을 정도로 좋았다.
대왕암보다 대왕암으로 가는 길이 더 좋았던 것처럼,
슬도 그 자체보다 오히려 슬도로 향하는 그 길이 너무나도 좋았다.
내가 이번에 울산에 머무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대왕암에서 슬도 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가 막 그친 후였고 평일 오후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 대왕암까지만 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덕분에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경이로운 풍경을 보며 슬도로 향할 수 있었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정신없이 바다와 파도와 멀어지는 대왕암 그리고 멀리 보이는 배를 보며 걷다 보니
중간에 외딴 벤치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정말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저 멀리에 조그만 텐트 하나가 보였지만 사람의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나중에 돌아갈 때 보니 낚시를 하러 온 사람이 잠시 쳐놓은 텐트 같았다.
벤치에 앉아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또 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나는,
처음으로 사진을 찍을 때 보는 것만큼 나오지 않는 게 안타깝지 않고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곳이 사진에 그대로 담기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또 유명해지고 더럽혀지겠어...
하는 이기적이고 우스운 생각.
물론 슬도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곳이다.
이미 드라마 촬영장으로도 사용된 적이 있고,
가는 길에는 인적이 드물었지만 막상 슬도에 도착하니 구경 온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또한 일렬로 쭉- 서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의 진풍경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내 기억에 더 남았던 것은 역시나 슬도보다는 슬도 가는 길이었다.
슬도에 도착하니 정겨운 마을 분위기가 느껴졌다.
바람도 파도도 세찬데, 이상하게도 따뜻하게만 느껴진 마을.
슬도에 도착한 후 등대 쪽이 아닌 뒤쪽으로 향하면 작은 마을이 있다.
벽화마을이라고 하기엔 벽화가 적고, 어디부터가 경계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는 성끝마을.
불과 아침까지만 해도 아파트들이 보이고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에 있었는데
이곳도 그곳과 같은 울산이라는 게, 갑자기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계획한 여행지가 아니기에 금방 보고 돌아올 생각이었던 나는
이상하게도 계속 이 마을을 맴돌고 또 맴돌았다.
마을을 맴돌며 작은 울음소리를 내는 하얀 고양이 한 마리와
눈이 마주치자 졸졸 따라오고 또 따라오는 강아지 한 마리를 만났다.
고양이와 강아지는 둘 다 혼자였고 외로워 보였지만 그래도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 마을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다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내 편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딘가 외로워 보였지만, 그렇다고 우울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소 쓸쓸하지만 그래도 행복해 보이는 곳.
그게 내가 느낀 슬도의 첫인상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순천으로 떠나야 했기에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슬도에서 대왕암을 거쳐 다시 일산해수욕장으로 돌아왔다.
막상 오니 그냥 가기 너무 아쉬웠고, 결국 바다 앞 카페로 들어가 울산에서의 마지막 밤을 추억했다.
아까 낮에 카페에 우산을 놓고 왔던 게 생각이 났다.
하지만 그곳에 다시 우산을 찾으러 가지 않고, 그 옆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끝내 우산을 찾지 않고 돌아갔다.
비가 그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바로 어제 산 우산이었는데.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마치 이곳에 금방이라도 다시 올 사람처럼...
그리고 나는 오늘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지금 여행이나 할 때인가 싶었던 때가, 진짜 이때가 아니면 못 떠날 때였던 거다.
금방이라도 다시 갈 것만 같던 울산도, 어떤 곳도 여행은 당분간은 어려워졌다.
그래서 여행이 더 소중한 것이겠지.
다음에도 이때다 싶을 때 떠나야지. 아직도 갈 곳이 정말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