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내셔널스와 시애틀 매리너스. 메이저리그에서 이 두 팀은 각 리그에서 월드시리즈를 밟아 본 적이 없는 유일한 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워싱턴 내셔널스는 2005년, 재정난에 허덕인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인수해, 워싱턴으로 프랜차이즈를 옮기면서 탄생했다.
내셔널스가 탄생하기 전, 워싱턴에도 2팀이 프랜차이즈를 둔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어느 팀이나 세너터스라는 명칭을 썼다. 아메리칸리그의 창설과 함께한 팀은 1961년 미네소타로 프랜차이즈를 옮기며 지금은 트윈스로 불린다. 또 다른 팀은 1961년 구단 확장 때 생겼지만, 역시 1972년부터 텍사스로 이전한 레인저스다.
2차례나 워싱턴을 떠난 이유는 저조한 성적에 따른 흥행 부진. 레인저스가 워싱턴에 있던 11년간 통산 성적은 740승 1,032패 1무로 승률 0.418에 그쳤다. 또한, 승률 5할을 기록한 적이 딱 1차례밖에 없었다. 이것은 트윈스 역시 마찬가지다. 60년간 4,223승 4,864패 99무로 승률은 0.465. 그래도 역대 최고의 강속구 투수로 꼽히는 월터 존슨을 앞세워 1924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적이 있다.
이 미네소타로 떠나기 전의 워싱턴 세너터스와 인연이 깊은 영화가 '엉겅퀴 꽃'(Ironweed/1987년)이다. 경제 대공황이 마지막 위세를 떨치던 1938년 뉴욕주 올버니. 한파까지 몰아쳐 거리의 부랑자들에게는 더더욱 추운 나날을 보낸다. 그 부랑자 가운데 프랜시스 펠란이 있다. 아카데미상을 2차례나 받은 잭 니컬슨이 분한 그는 과거 워싱턴 내셔널스에서 주전 3루수로 뛴 스타 플레이어였다.
그의 나이는 50대 전후. 그러므로 역산해보면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것은 1910년대로 유추해볼 수 있다. 1911년까지 하위권을 헤매던 세너터스는, 1912년 돌풍을 일으키며 리그 2위를 차지한다. 펠란은 그때의 주역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펠란은 가상 인물이다 이 시절 세너터스의 3루수는 에디 포스터였으니까.
어쨌든 펠란이 유명 선수에서 부랑자로 전락한 데는 이유가 있다. 갓 태어난 아들을 실수로 죽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매일 자책하며 슬픔을 잊기 위해 술독에 빠진다. 그래도 잊혀지지 않는 사실. 그리고 공허감.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글러브와 배트를 내려두고 세너터스의 유니폼을 벗는다. 결국은 가족까지 버리고 거리의 부랑자가 된다.
메인 스트리트에서 벗어나 뒷골목을 떠도는 신세가 된 그. 그 생활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삶을 보내는 헬렌을 만난다. 그녀는 예전에 가수와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쳤다. 그런 어느 날, 펠란은 전처 애니를 찾아간다. 22년 만의 재회. 그때, 그는 자신에게 손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손자는 열렬한 야구 소년이다. 펠란의 재능이 손자에게 이어진 것.
그 손자를 위해 20여 년 만에 글러브를 잡는다. 잊은 과거의 감촉이 살아나고, 손자에게 글러브와 공 잡는 법 등을 가르쳐준다. 야구는 그렇게 전승되어왔다. 지금처럼 클럽 등에서 배트 쥐는 법 등 세세한 하나하나까지 배우지 않고, 주위에서 하는 것을 보며 그 규칙과 기본을 눈으로 익혔다. 그리고 가족 내의 웻세대를 통해 요령을 배웠다. 요컨대 야구는 세대와 세대를 잇는 매개체였다. 영화에서 야구의 전승은 암울한 영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따뜻함이 배어나는 유일한 장면이기도 했다.
문득 이 영화는 워싱턴의 야구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2차례나 프로구단이 떠난 도시. 그 비참함과 절망감, 어딘가 묘하게 닮았다. 그리고 펠란이 손자에게 야구를 가르쳐주는 것과 어렴풋한 결말은 몬트리올을 거쳐 워싱턴에 3번째 메이저리그 구단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