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선셋 대로'(Sunset Blvd./1950년). 거장 빌리 와일더 감독의 명작이다. 그는 메릴린 먼로의 지하철 통풍구 장면으로 유명한 '7년 만의 외출'과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사브리나'의 메가폰을 잡았다. 또 '잃어버린 주말'과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로 2차례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손에 넣기도 했다.
'선셋 대로'는 영화계의 성지 '헐리우드'를 배경으로 재능을 소비한 작가와 무성영화 시절의 슈퍼스타였지만 이제는 한물간 여배우 간의 애증을 그리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 조 길리스(윌리엄 홀든 분)는 한때는 큰 인기를 누렸지만, 지금은 자동차 월부금도 못 내는 신세다. 오늘 중으로 300달러를 주지 않으면 자동차를 압류당할 처지.
그래서 영화사를 찾아가 자신이 구상한 시나리오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그 시나리오는 야구와 관련한 작품이며, 그 내용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보육원 출신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대활약을 펼친다. 그런 어느 날 예전 친구가 찾아와 승부조작을 제안하고…….
굳이 영화사 비서인 베티(낸시 올슨 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어딘가에 본 듯한 흔한 스토리다. 즉, 돈을 벌기 위해 이것저것 짜깁기해서 급조한 것이다.
결국, 영화사에 시나리오를 팔지 못한 길리스는 선셋 대로의 어느 저택에 숨어들고, 그곳에서 무성영화 시절의 꽃 노마 데스먼드(글로리아 스완슨 분)를 만난다. 그녀는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고, 그러는 사이에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길리스의 마음은 베티에게 향하고. 결국, 삼각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대립.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데스먼드는 무성영화의 세계에서 틀어박혀 자신만의 망상에 빠져 산다. 자신은 여전히 최고의 스타라고. 이 내용도 어떻게 보면 야구계와 닮았다.
2000년대에 들어 야구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이른바 '머니볼'로 대표되는 통계를 야구계가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어느 야구 관계자는 '머니볼'의 저자 마이클 루이스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의 야구는 프로야구를 하는 사람들 '왕국'과 프로야구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의 '공화국'이 대립해오고 있다. 왕국은 주관의 세계이지만, 공화국은 객관의 세계다. 직감은 거짓을 포함하고 있지만, 숫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이 말에서 왕국을 무성영화로, 공화국을 유성영화로 바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통계라는 거대한 흐름에 뒤처진 이들은, 야구에는 특별한 무엇이 있으며 그것을 숫자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바람과는 달리, 야구계에서 숫자의 지배력은 더더욱 커져만 가는 게 현실. 그리고 이것을 부정할수록 야구계의 노마 데스먼드가 되어 갈 뿐이다.
'선셋 대로'가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대립과 그 몰락을 그리고 있다면, '아티스트'(The Artist/2011년)는 둘의 공존과 화해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도 야구가 등장한다. 유성영화의 등장과 함께 만인의 연인이 된 페피(베레니스 베조 분)가 찍은 작품 가운데 하나가 야구 영화. 야구 유니폼을 입고 배트를 휘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