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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윤 Sep 19. 2022

가을 날의 동화


'영웅본색'으로 인기 배우에 오른 주윤발과  종초홍이 주연을 맡은 '가을 날의 동화(An Autumn's Tale/1987년)'.


홍콩에서 뉴욕행을 준비하는 제니퍼. 연극 공부를 위한 유학길이지만, 실제로는 애인 빈센트와 함께할 기대에 룰루랄라. 캐치볼을 할 글러브와 함께 찍은 사진 등도 챙긴다. 마치 시즌이 시작하기 전 프로야구처럼 제니퍼는 장밋빛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막상 시즌이 시작하면 선수들뜻밖의 부상과 부진 등에 빠져 힘겨운 장기 레이스를 치러 듯, 제니퍼의 뉴욕 생활도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다.


그녀를 기다리는 먼 친척 사무엘 팡은 어머니의 말과는 달리 내일이 없는 오늘만 사는 남자다. 그가 사는, 제니퍼가 앞으로 살아야 하는 곳도 화려한 뉴욕의 야경과는 정반대인 빈민가. 게다가, 그녀의  애인은 다른 여자와 사귀는 중. 마치 팀의 중심인 에이스나 4번 타자가 시즌을 시작하자마자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상황과 같다. 그런 팀이 가을야구에 진출하는 건 하늘에 별 따기. 제니퍼 역시 실의에 빠져 암울함의 심연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한 시즌이 끝났지만, 야구도 인생도 '다음'이 있다. 내일의 희망이 오늘을 사는 원동력이 된다. 제니퍼는 이별의 아픔을 서서히 잊고 애초 유학한 목적인 연극 공부에 매진한다. 또 방도 새롭게 꾸미고 아르바이트도 하며 현재의 생활에 적응한다. 팀의 주축 선수가 FA 등으로 떠난 뒤, 다음 시즌을 위해 팀을 정비하는 것처럼. 그리고 다음 시즌이 시작하듯,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사무엘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며 자연스럽게 특별한 감정이 생겨난 것. 연애 감정. 공원에서 야구를 즐기며 웃음이 떠나지 않는 환희의 연속을 꿈꾸지만 실제로는 여름철 프로야구 순위 경쟁처럼 치열함의 연속이다. 가까워진 듯하다 다시 멀어진다. 마치 포스트시즌 진출 티켓을 손에 넣은 듯하다 다시 뒤로 밀리는 엎치락뒤치락한 프로야구 순위 다툼처럼. 게다가, 사무엘과 제니퍼는 서로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달라 '밀당'과 감정의 엇갈림은 더 크게 나타난다.


처음에는 함께하는 것 자체가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막상 그렇게 되면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더 진전된 관계를 원한다. 야구 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가을소풍이 아닌 가을야구만 해도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다가, 응원하는 팀이 가을야구에 오르면 그 정점에 서기를 원한다. 하긴, 이것은 코칭스태프나 선수단, 팀 관계자 역시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온 말이 "우짜겠노,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다고 해도 아마추어 녹아웃 시스템과는 다르다. 최근 프로야구는 한•미•일 모두 포스트시즌 경기가 늘어나 한 달 안팎의 일정으로 치러진다. 내일이 없는 오늘만 사는 방식으로 해서는 이 한 달을 버티기는 어렵다. 정규시즌이 42.195km를 뛰는 정식 마라톤이라면, 포스트시즌은 단축 마라톤과 같다.


다만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에 오르기 위해 다소 무리를 할 때도 있다. 선발 투수의 로테이션을 조정하거나 불펜 투수의 투구 이닝을 늘리거나 한다. 그것이 성공했을 때는 '신의 한 수'로 추앙받는다. 반면, 실패했을 때는 '악수'가 돼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메이저리그 감독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5전 3승제로 치러지는 디비전 시리즈다. 선발 투수를 3명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4명으로 할지 결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약한 팀이 강한 팀을 잡을 확률도 높다.



요컨대, 사무엘이 내일의 삶을 위해 목표와 계획을 세우듯 감독도 마찬가지다. 그 목표와 계획이 어긋나면 책임이 따른다. 어떤 의미에서 야구 감독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통솔력이나 작전 능력 등이 아닌 책임을 지는 것에 있다. 결과에 따른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하므로 감독을 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평소처럼'이 강조되는 가을야구. 그러나 때로는 다소의 무리도 용인된다. 내년에 더 향상된 전력으로 더 높은 곳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것은 불확실성의 세계다. 장기 레이스에서는 뜻밖의 부상이나 부진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악재가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 냉혹하며 치열한 세계가 프로야구다.


영화 속 시계와 시곗줄의 엇갈림처럼 기회가 왔는데 내년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소심함과 무능함일 뿐이다. 기회가 왔을 때, 잡는 것. 그래서 가을에는 마법과 같은 사랑도, 기적적인 우승도 일어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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