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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윤 Sep 08. 2022

시빌 액션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다. 타격과 투구, 수비 성적은 물론, 그 플레이 하나하나가 기록지에 남아 보존된다. 물론, 영상처럼 완벽한 재현은 아니라고 해도, 기록지에 기억이 합해져 아련한 추억이 되어 입으로 개인 전승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독특한 타격폼을 지닌 선수가 어느 경기에서 어떤 플레이를 해, 응원하는 팀이 어떻게 이겼는지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설명한다. 리그의 공식 기록지가 아닌 개인이 작성한 기록지는 그런 역할로 활용되기도 한다. 또 선수 플레이 하나하나를 쓰면서 자신이 역사의 증인이 된 듯한 뿌듯함도 있다.


영화 '시빌 액션'(A Civil Action/1998년)의 제롬 파처(로버트 듀발 분)가 그렇다. 대기업의 고문 변호사인 그의 자리는 본사의 지하 창고와 같은 곳이다. 여기에 그의 성격은, 싹싹함이나 친근함과는 거리가 멀다. 회사 내에서 그와 친하게 지내는 이는 거의 없다. 어쩌면 그의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일지도 모른다.



라디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보스턴의 경기를 꼼꼼하게 기록지 위에 쓰는 게 그의 유일한 취미이자 즐거움이다. 어쩌면 그가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에서 일하는 이유도, 라디오를 들으면서 기록하는 즐거움을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잡동사니가 쌓인 탁자의 한 곳. 거기만 스탠드 조명 등으로 어둠을 밀어낸다. 그리고 스탠드 조명 아래에는 라디오가 놓여 있다. 창문 옆이라 전파도 끊기지 않는 최적의 장소다. 그리고 샌드위치와 비스킷, 커피 등이 준비되고, "플레이볼!"과 함께 그것을 먹으면서 연필로 기록지를 채워 나간다.


그의 실재 눈앞에는 어둠뿐이지만, 아마 그의 머릿속 눈앞에는 펜웨이파크의 푸른 잔디와 그린몬스터 등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야구장을 찾지는 못하지만, 오랜 팬의 열렬함도 느껴진다. 그런 시간을 누군가 방해하면, 그의 눈에서는 검찰청에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가 쏜 레이저보다 더 강렬한 광선이 뿜어져 나온다. 또 회사의 중요한 문서를 받아도, 기록 작성에 방해가 되지 않는 곳에 내던져 둔다. 마치 플레이를 방해하는 관중의 행위처럼 여기는 듯하다.


그에게 이 시간. 라디오를 통해 보스턴의 경기를 들으면서 기록하는 시간은 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보스턴이 이기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패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그에게는 경기를 들으면서 기록하는 즐거움. 이것만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재판도 그렇다. 그에게는 재판 결과도 경기의 승패와 마찬가지다. 자기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문제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일 뿐. 라디오를 통해 보스턴 경기를 들으면서 기록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영화에서는 그의 반대편에 쓴 변호사 잰 슐리츠먼(존 트라볼타 분)이 그의 인생을 걸고 노력하지만, 대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야구가 그렇듯, 그 과정의 모든 것도 기록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것이 햇빛을 보는 날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것이 기록의 위대함. 요즘,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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