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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채원 Oct 10. 2023

2_4. 저 이제 은퇴인가요

어진과 족자로 시작된 내 이력서는 어려운 분야를 자꾸만 불러왔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시작된 커리어가 국립경주박물관, 국립역사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신라유산문화원...으로 차례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키워드는 고대+한중일이었다. 고대도 어렵고 한중일도 어려운데 고대와 한중일의 콜라보라니! 1시간-6시간 통역을 위해 평균 준비기간만 5일에서 10일이 걸린 것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회의는 고대 불상 학회와 원효대사 탄생 1300주년 기념 학회였다.



간다라-북조-삼국시대-고분시대 고대 불상 심포지엄


원래 선배님이 하시던 통역이었다. 선배님이 일정이 안 되셨는지 TO가 생겼다. 이것은 분명하게 내 이력서의 어진과 족자가 불러온 참사 회의였다. 프로그램을 받아보고 눈을 의심했다. 고대 인도 간다라, 중국 북조시대, 한국 삼국시대, 일본 고분시대에 이르는 불상을 비교하는 학회라고 한다.


'간다라라니!!'


간다라, 그래 중학교였나 아냐 고등학교였나, 아무튼 세계사인가 세계지리인가 어딘가에서 본 기억은 난다. 인도...였던 거 같은데, 그리고... 웬걸, 나의 지식은 딱 거기까지였다.


간다라에 정신이 팔려 존재감이 미미해 보였는데, 북조시대도 있지 않은가. 내가 중국에 대해 아는 것이 있던가... 현대 불상도 어려워보이는데, 간다라와 남북조와 삼국시대와 고분시대의 불상이라니. 내 통역 인생, 펴보지도 못하고 은퇴겠구나. 아직 10년도 못 했는데... 또 소리 죽여 절규했다.


우선 시대 배경을 이해하고 정리하는 데 막대한 시간이 들어서이다. 청동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중국-한국-일본 연대표를 보기 쉽도록 정리하고 이해하는 데만 꼬박 이틀의 시간이 걸렸다.


불상의 이름을 듣고 이미지를 떠올리는 데 든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여래상, 금동불, 반가사유상, 백도불, 지장보살상, 수월관음도, 오백나한도 등 이름만 들었을 때 전혀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았다. 자가 퀴즈를 해았다. 각각 무엇이 다른지를 이미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불상이나 작품 이름을 가린 상태로 불상 형태를 보고 종류를 맞춰보는 퀴즈를 만들었다.


스마트 시티 같이 현대에 익숙한 분야라면 바로 발표자들의 발표자료를 보고 준비했을 것을, 발표자들의 기본 지식을 따라가기 위한 사전 작업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저를 강하게 키우시려는 겁니까  



다행인 걸까, 파트너가 누군지를 알게 되니 주제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파트너가 무려 지도교수님이었다. 대학원에서 나를 가르쳐주신 은사님이자 한일 통역계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우리 학교 주임교수님과 졸업 후 처음으로 통역 파트너로 나가게 된 것이었다.


당시는 졸업한 지 10년이 되었을 시기였다. 졸업 때보다는 성장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스승에 대한 보은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앞으로도 얼굴을 뵈어야 했다. 당시 박사를 따기 전이어서 논문 지도도 받고 있었고, 통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매주 학교에서 뵙고 있었다. 과연 나는 앞으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까?


교수님은 절대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지만 졸업 시험 후 처음으로 내 통역을 들려드리는 것이니... '아니 10년이나 흘렀는데 아직 그렇게밖에 못하니?'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일만은 없어야 했다. 수치심으로 화끈대는 얼굴로 학교에 출근할 것인가, 어깨를 펴고 통대 현관을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이제 공은 울렸다.


"일단 나는 자료 나온 건 무조건 다 번역해서 녹음하고 달달달 외워 갔어"


전에 담당했던 선배님께 조언을 구했다. 본인도 그랬다면서 팁을 이것저것 알려주셨다. 좋은 건 일단 따라하고 보자. 들으면서 밥을 먹고 들으면서 씻고 들으면서 잠이 들고... 무한재생이 시작되었다. ppt나 강연 자료만 보고 혼자 강연과 통역을 해보는 시뮬레이션도 했다. 전체 준비에 든 시간은 매일 8시간씩 풀데이 4일+하프데이씩 6일= 총 10일이었다. 행사 당일에는 자료만 수백장, 과장 좀 보태서 약 1만개의 용어집을 안고 출근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당일날 아침, 가르치고 있던 통대 학생들 15명이 참관을 왔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교수님 어찌하여 이리 저를 강하게 키우려 하시나이까...'


이것은 마음의 소리고 겉으로는 "아 정말요?" 이렇게 여유를 부렸지만 내 정신이 아니었다. 심장소리가 너무 컸다. 커피를 많이 먹은 탓일까. 아니야 잠을 못 자서 그런 걸거야. 정말 한 숨도 못 자고 갔으니까. 공부도 미리 마쳤고 11시에 자리에 누웠지만 이날처럼 잠이 오지 않는 날은 꼽을 수 없을 만큼 말똥했다. 덕분에 아침에는 졸릴까봐 걱정이 되어서 커피를 정말 한 대야를 마셨다. 이미 오전 10시 전에 벤티 사이즈로 3잔은 마셨을 것이다.


드디어 결전의 시간은 오고야 말았다. 10시. 딸깍,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내 마이크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몇 백명 청중 보다 더 부담스러운 단 한 명이 내 오른 쪽에 있었다.


"네 지금부터 기획특별전 <고대불교조각대전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 전시연계 학술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마이크 불이 들어오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처음 30초 정도는 내 오른쪽에 뭔가 거대한 존재의 그늘이 느껴졌지만 금세 무아지경에 빠질 수 있었다. 그냥 들리는대로 통역하고, 준비한 것들을 꼭 활용해보고자 했고, 가끔은 무한재생한 녹음 목소리 중 어느 것들이 나오기도 했다. 결과부터 말한다면 대단히 무사히 끝났다. 우려했던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돌아와서는 내가 고대 불상인 듯 20시간 잠만 잤다. 은퇴 위기도 넘겼고 말이다. 물론 은퇴의 위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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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죽자사자 공부했지만 시간이 지나 희미해진 내용들을 복기할 겸 여러분들께서도 유용하게 써주셨으면 하는 지식의 단편들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당시 만들었던 한국-일본-중국-인도 왕국 연대표 및 해당 일본어 표기를 가져와봤어요.

 * 한국-일본은 어렵지 않기에 저에게 생소한 인도 왕조나 중국 국가명만 일본어로 적어 두었답니다. 통역할 때 빨리 보고 맵핑해야 하므로 중국 국가명은 한자 보다 히라가나가  확실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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