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자료 송부 드립니다!"
담당자님께 메일이 왔다. 두근 두근, 메일에 첨부된 파워포인트를 열어보았다.
#%%가 ^ㅀ^&해서 *@$&한 문제로 *2#*()($@#~한 상황인데
%&에 관해 $%$하여 !$ㅊㅇ& 관련 $%@$한 *(^$^@$....에 대해 의견을...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리니...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빼곡했다.
조사 빼고 이다-하다- 빼고 모두 처음 보는 용어였고, 심지어 영어 용어였다.
현대적인 주제는 공부할 수 있는 재료가 워낙 많다 보니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그것은 이 회의를 만나기 전까지의 내 착각이었다. 유독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고 통역하는 순간에도 외줄 타기 같던 주제가 있었다. 바로 첨단 바이오 의약품 규제 관련 정부부처간 워크샵이었다.
전문가 간 회의는 분야지식이 광범위하기에 제일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통역사이다. 세포치료제나 유전자치료제를 비롯한 첨단재생의약품과 정부 규제가 대주제였지만, 생물학, 약학, 독성학, 의학, 규제, 법률 등등을 광범위한 분야가 총망라되어 있었다. 분야 지식이 없으면 한 줄도 이해할 수 없었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뭘 모르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바이오 의약품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야 하고, 적응증은 무엇이고 기전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했다. 신규로 허가가 난 의약품과 이번에 통과되지 않은 의약품도 알아야 했다. 임상시험 방법도 알아야 하고, 규제가 들어가니 법률적인 내용도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한국 일본 모두 국제 기준에 따르고 있으니 국제 규격도 알고 있어야 했다.(대략 공부할 게 많다는 의미다)
처음에 통역 의뢰가 왔던 때는 설레기만 했다. 막상 회의 자료를 받은 10월에는 8월의 나를 원망했다. 매번 통역자료를 받을 때마다 충격->의심->부정->원망->내적 절규->인정의 수순을 거친다. 한탄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 결론은 늘 같다.
"어쩌겠어, 다 내가 한다고 한 건데 별 수 있겠어 그냥 하는 거지...
이왕 하는 거 책임감 있게 잘 해야지 않겠나?"
회의가 11월이어서 그나마 시간의 여유가 있던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한 달 간 사법고시 준비하듯 파트를 나누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요즘 국제회의 자료는 대부분 영어로 작성된다. 언어마다 다르겠지만 일본어-한국어 통역사에게는 일단 영어가 많은 주제 분야나 자료는 고난도로 느껴진다. 한국어-일본어로는 직선 거리로 2미터면 될 것을 한국어-영어-일본어를 거치니 지구 한 바퀴 반처럼 멀어진다. (아니 아무리 요즘에는 영어가 기본 소양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 전문 분야를 영어로 술술 읽었으면 영어 통역사를 했겠지- 이상 마음의 소리였다) 자료 없는 통역도 많으니 그래도 뭐라도 있음에 감사한다.
우선 가볍게 번역을 해서 맥락을 파악한다. 용어의 수준은 평소 일상생활에서 전혀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이식편대숙주병, 파이어플라이 루시퍼레이즈, 인체 동종 지방조직 유래 중간엽줄기세포 같은 것들이 '은/는/이/가/을/를' 같은 조사 빼고 나머지 문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이런 통역은 개념 이해와 용어 정리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런 통역에는 불문율이 있다. 용어만 따라가면 백발백중 통역을 망친다는 것이다. 반드시 개념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바이러스 벡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같은 개념을 모르면 [O는 △를 ◆해서 ◉했습니다] 같이 말 표면만 따라가기에 급급해진다. ◆가 받침하나 잘 들리지 않아도 통역 품질이 확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산들 바람에도 항로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개념 공부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생소한 분야일수록 내가 뭘 모르는지 조차도 모른다. "너의 지식은 지금 학부 1학년 1학기 수준이니까 이것부터 공부하도록 해!" 이렇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 현재 위치에 대한 좌표가 없는 것이다. 이럴 때는 다시 용어를 단서 삼아 조금씩 상위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 유용하다.
하지만 하루 회의 자료에서 용어만 천 개에 달한다면? 개념 이해까지 개당 10분씩만 소요되어도 무려 1만분, 166시간 40분이다. 하루가 24시간인 것이 야속할 뿐이다. 심지어 그 24시간 중 얼만큼의 시간을 공부에 활용할 수 있을까? 자다 지쳐 일어나던 대단히 한가한 프리 초기와는 달리 연차가 쌓이면 그 주에, 그 달에 그 통역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시간 싸움에 접어들게 된다. 가용 시간을 어떻게 배분하고 활용하는 가가 매우 중요해진다.
이 통역 때는 용어만 해도 30페이지, 5,361개 단어에 달했다. 준비에 한달간 틈틈이 시간을 쓸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심지어 전문 분야는 용어 1개를 두고도 사람에 따라 각자 편한 방식으로 다르게 말한다.
이식편대숙주병을 graft versus host disease라고도 했다가 GVHD라고도 하는 식이다. 용어를 정리할 때는 한국어-일본어 뿐만 아니라 영어와 약자까지도 묶어서 익혀야 했다. 같은 말을 서로 다르게 했을 때 통역사만 모르는 리스크를 없애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영알못인 나를 탓해야겠지만 내용 부하가 클수록 알파벳 용어는 한 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한국식 일본식 발음도 따로 적어간다. 개념도 되도록 간략하게 적는다. 나는 천재가 아니므로 한 번 보고 삼라만상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니 꺼진 불도 다시 본다, 이미 찾아본 개념이라도 두 번 세 번 정리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인체/인간(동종) 지방조직 유래 중간엽줄기세포 I ヒト(同種)脂肪組織由来 間葉系幹細胞 I Human (allogeneic) adipose tissue-drived mesenchymal stem cell (휴먼 (알로제닉) 애더포우스 티슈 드라이브드 메젠카이멀 스템셀)
이식편대숙주병 I 移植片対宿主病(いしょくへんたいしゅくしゅびょう) I graft versus host disease(그래프트 벌서스 호스트 디지즈) I GVHD I 동종조혈모세포이식 후 공여자의 면역세포가 환자의 정상세포를 공격해 거부반응이 발생하는 질환
반딧불이 루시퍼레이즈 I ホタルルシフェレーゼ I firefly luciferase(파이어플라이 루시퍼레이즈) I 반딧불이에서 발현하는 발광효소 반응물질
용어와 개념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한 세월이었지만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섰을 뿐. 전문가들은 용어와 개념을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발제와 질의응답을 한다. 갈 길이 너무나 멀다. 체력과 정신력이 통역 전에도 필요한 이유이다.
용어를 한 손에 끼고 자료를 반복해서 읽으며 질의응답 내용을 파악한다. '여기에서 논의가 추가로 되겠구나', '여긴 가볍게 넘어가겠구나' 이런 전체 그림을 그려본다. 아젠다를 다시 읽으면서 탑다운으로 회의를 시뮬레이션하고, 다시 용어를 읽으면서 버틈업으로 회의를 시뮬레이션한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
문제는 용어가 아무리 읽어도 쉽게 잊혀진다는 것이다. 한 번 보고 다 이해가 되고 암기가 된다면 이미 TV에도 나오고 하버드도 NASA도 나를 모셔갔지 않았겠냐 말이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심지어 한창 노화가 진행중인 사람일 뿐이다. 입에 붙으려면 지겹게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눈으로만 읽고 지나가서는 안되고 입으로 소리내서 말을 해야 한다. 눈으로만 읽으면 정작 말을 하려고 할 때 입이 잘 안 떨어진다. 내 입술에게는 아직 경험이 없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문용어가 많은 회의는 흡사 부스 속이 기도실 같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주기도문 같은 중얼거림이 난무한다. 파트너와 '오셨어요~'만 나누고 다시 입은 중얼중얼. 음향이나 마이크 체크를 하면서도 중얼중얼. 서로 같이 있지만 너도 나도 초점 없는 눈으로 용어를 반복 암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통역사들은 워낙 통대 시절부터 쉐도잉이나 혼자 통역 연습을 하면서 중얼중얼거리는 게 흔해서 이 풍경이 익숙하긴 하다. 음소거로 입만 실룩거리다가 지하철 맞은 편 사람의 시선을 느낀 적이 있긴 했지만. 요즘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이 나와서 너도 나도 허공 보고 입을 움직이니, 다들 신경을 쓰지 않게 되어서 고맙기도 하다.
모든 것이 생동하는 아침, 모닝 커피 한 잔을 들고 "오늘도 좋은 하루~"를 외치고 싶지만 통역사들은 이미 초췌 그 자체다. 어디까지 준비하는 게 적정선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통역사들은 거의 가능한 할 수 있는 데까지 준비를 하고 간다. 잠도 푹 못 잤을테니 얼굴도 푸석하지만 또 머리속은 여기 저기 대포가 터지는 전쟁터다. 아, 이 용어 뭐였지? 어 장표 순서가 바뀌었나? 엇 앞에 띄워진 자료는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참석자 분들 추가되었나? 직함이 뭐지?
"똑똑. 선생님들 오늘도 잘 부탁 드립니다. 이거 살짝 업데이트된 내용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지만 속에서는 걱정이 한가득 밀려온다. 시작까지 30분! 그래 할 수 있어!! '선생님 먼저 보시겠어요?' '네 제가 번역 어플 돌려서 공유할게요' '그럼 저는 참석자 체크하고, 장표 바뀐 거 체크하고 올게요'
착착착착 부스 안에서 역할 분담을 한다. 이럴 때일수록 든든한 영혼의 짝꿍, 파트너 선생님의 존재가 얼마나 든든하고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순차통역이었다면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해야 했을텐데 말이다.
회의는 예상했던대로, 무지하게 어려웠다. 영어와 용어를 섞어만든 총알이 헤드폰 너머에서 두두두두 쏟아지는 느낌, 가끔은 헤드폰이 펑 터질 듯 한 대포도 날아왔다. 처음 듣는 개념, 처음 듣는 용어, 처음 듣는... ???만 가득한 말들...
때문에 이 회의에서는 파트너와의 통역 배분을 처음에는 10분씩 교대로 하다가, 나중에는 5분씩으로 줄여가며 해야 했다. 통상 동시통역은 파트너와 15분-20분 정도를 주기로 교대하는 것이 기본이고, 한 발제를 기준으로 구분할 때는 30분도 혼자 맡아서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5분마다 통역을 교대해야 했다는 것은? 지옥불 같은 하드한 내용이었다는 의미이다. 태어나서 이렇게 1분이 더 더디게 흐르는 게 처음인 듯, 영겁의 시간이었다.
극히 무지한 분야다 보니 보통 통역을 마치고 나면 "끝났다!!!" 같은 후련함이나 개운함이 있어야 하는데 이 회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한 통역이 100% 맞는지, 혹시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지 걱정되었다. 파트너로 함께 해주셨던 베테랑 선생님께서는 짐 정리를 하면서 이제 다음은 없을 것 같다고 하셨다. 서늘한 가을 날씨에 이미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그러나 기우였을까,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담당자님이 부스로 찾아와 다음 회의에도 함께 해달라며 5개월 후의 회의도 예약을 해주시는 것 아니겠는가. 아아, 그때의 안도감이란... 그제서야 드디어 이 회의가 끝난 것 같은 후련함이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너무나 가벼웠다.
덧
이러한 우리의 노력이 무용하지는 않았던지 이후로도 그 인연은 이어져 벌써 몇 년째 맡겨주시고 있다. 더욱 양질의 통역을 제공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일 것이다. 자주 하는 분야가 아니라서 휘발되는 것이 아쉽기에 의약품 규제과학 전문가 양성 교육과정이라는 것도 수강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분야 지식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통역사들의 부하를 이해하고 한 달도 더 전에 자료를 챙겨주시고, 용어와 개념에 대한 너무나 초보적인 나의 질문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상세하게 알려주시는 담당자님께 감사를 전한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이해해주시는 탁월한 이해력과 좌우 분간도 못 하는 나의 통역도 넗은 마음으로 수용해주시는 넓은 이해심에도 감사를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