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가 된 후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통대 시절, 교수님들께서 통역사는 제너럴리스트이자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넓고 깊게'. 전반적인 분야에 대해 두루두루 알면서 또 특정 분야에는 전문가 수준으로 특화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통역 업계의 상황은 분야를 특화할 새도 없이 그저 의뢰가 오는 순서대로 일을 하기 쉽다는 것이다. 특히 분야를 막론하고 경력이 적은 초창기에는 전문 분야랄 것이 있을 수 없다. 전문 분야라는 것은 실전을 통해 점차 축적해나가야 하는 것었이다.
언어별로 상황이 다르기도 하다. 영어는 다른 언어 대비 수요가 많으니 제약, 보험, 금융 등 분야를 특정해서 활약하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일본어의 경우 내가 제약이 전문 분야라서 제약만 받겠다고 하면 한달에 한 번도 일을 못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런 질문을 종종 받으면서 물음표가 피어오르던 12-3년차즈음이었던가? 한 은사님께 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어떤 분야 전문이세요? 가끔 이렇게 물어보는 분들이 계시는데 선생님은 뭐라고 답하세요?"
"어떤 분야 전문이겠어, 어려운 분야 전문이지"
마주보며 한참을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날도 우리는 머리에 증기가 피어오를만큼 어려운 주제로 통역을 하고 있었다. 무슨 도시사학 학회의 점심 시간이었다. 중국의 당나라 청나라 명나라의 수도 구조와 건물이 나오고,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의 수도 변천사와 성곽의 특성 같은 내용이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이 은사님과 꽤 오래 여러 회의를 함께 했던 걸 보면 나도 어려운 분야에 자주 걸리는 편이 확실했다.
일반 청중들 입장에서 봤을 때 국제행사 개막식 같은 세레모니 계열 행사가 시각적으로 가장 멋져 보이는 행사일 것 같다. 규모도 크고 호텔이나 컨벤션 같은 화려한 행사장에 화려한 연사 라인업에 공연팀까지 오니 말이다. 하지만 통역사 입장에서 이런 행사가 가장 난이도가 낮다. 세계 평화와 발전과 상생 같은 좋은 말만 주로 오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장 어려운 회의는 전문가간 회의나 학회이다. 몇십년 간 한우물을 판 전문가들, 최정예 선수들이 등판을 한다. 그 안에서 그 분야 지식이 제일 부족한 것이 아마 통역사(=나)일 것이다.
통역 주제라는 것이 뽑기 운이라도 있는 것일까? 나 역시 어려운 분야 당첨률이 높은 편이었다. 17-8년차부터는 상대적으로 수월한 분야도 많아졌지만 15년차 정도까지는 매번 비포장도로 같았다. 쉬웠던 통역을 찾는 게 더 빠를 만큼 공부가 필요한 분야들뿐이었다.
물론 분야에 대한 난이도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어떤 통역사들은 기술 기계 같은 공학적 분야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하고, 어떤 분들은 반대로 아티스트나 노래, 작품 같은 것을 몰라서 방송분야에 어려움을 느낀다고도 한다. 나는 감사하게도 삼성전자에서 기술 기계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던 덕분에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메커니즘은 거부감이 없다. 엔터 분야는 즐기는 편인데 어렸을 때 댄스가수가 꿈이었던 이유도 있다. 하지만 내게 너무나 높은 벽이 느껴지는 분야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한중일 역사나 문화재와 관련된 분야였다. 한중일 족자, 한중일 어진, 아시아의 고대 불상, 중국의 청명상하도, 소상팔경도 등 조선시대 회화, 동아시아의 수도 변천과 성곽, 일본 고분시대의 철기, 동아시아 궁중공예물질문화, 한중일의 화장문화, 신라시대의 바둑과 마랑명 칠기, 묘법연화경, 법화경, 불교 미술과 역병, 동아시아 서아시아의 청동기 시대 유리, 고대 삼국시대-중국-일본의 세시풍속, 일본 수묵화, 일본 단가...
그냥 읽어도 아득해지는데, 이 주제만 평생을 연구해온 학자들이 그것을 30분 정도로 압축해서 발제하고 토론까지 한다는 점이 부하(라고 쓰고 공포)를 가중시킨다. 화장문화라고 하면 화장품이 있었나보다가 아니라 화협옹주묘 출토유물이라던가, 조선시대 사대부 묘제, 청화백자, 색회등나무무늬합, 칠보무늬 팔각호, 묘지석, 분채백자 같은 18세기 화장용 자기의 특징 등을 논한다. 심지어 하루에 열 몇 명의 학자가 발표하고 토론까지 할 때도 있으니... 이런 학술대회 통역을 맡게 되면 매번 눈앞이 캄캄해진다. 아마 다시 같은 분야를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다. 이렇게 말하지만 막상 또 닥치면 해야지 어쩌겠어.
이런 통역의뢰가 온다면 거절하면 되지 않겠냐고? 통역 의뢰 시스템상 그게 쉽지가 않다.
통역 의뢰 시스템의 특징을 말해보자면 크게 직접 의뢰와 간접 의뢰가 있다. 직접 의뢰는 주최측에서 직접적으로 통역을 의뢰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국립중앙박물관 담당자가 세미나 통역을 의뢰한다고 연락을 했다면? 기본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의미다. 일단 고대 중세 근대 중 어느 지점의 작품이나 연구 결과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겠구나, 박물관은 전시와 연계해서 행사를 하는 경우가 많으니 대략 앞으로 있을 전시와 관련된 내용이겠구나... 이런 것들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연간계획 월간계획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한편 간접 의뢰는 에이전시를 통해서 수주하는 형태이다. 상세하게 알려주는 에이전시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주최측, 날짜, 장소 정도만 제시하고 상세한 주제를 모르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지난 번 소개한 007작전처럼 '부산, 벡스코, 3/5 10시' 이런 식으로 의뢰가 오는 일도 있다. 뭔가 모를 행운의 과자를 뜯었는데 열어보니 폭탄이더라 같은 뽑기운 이야기가 여기서 나온다.
연차가 낮을 때는 뽑기운이 나쁜 게 뭐 대순가, 일을 고를 처지가 아니었다. 통역사들의 '시즌'이라 불리는 가을에는 베테랑 선생님들의 일정이 빠르게 차기 때문에 낙수 효과로 순번이 돌아올 때가 있다. 프리랜서 초기, 한창 국제회의가 많은 10월 내내 백수였던 나는 낙수효과로 한중일 어진 학회 통역 기회를 얻었다. 그것이 족자로 이어지고 불상으로 이어지고 바둑으로 이어지고... 처음에는 우연이었지만 그런 경력이 쌓이다보니 이제는 내 이력서가 어려운 분야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어려운 주제를 수락한 것은 본인 판단이라는 것이다. 주제를 알고 어려운 분야라는 데 눈 앞이 아득해지는 것은 20년차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푸념은 아니다.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니고, 하기로 최종 결정한 것은 나 자신이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이 과정이 은근히 자극적이고 중독적이다. 새로운 분야를 만날수록, 어려운 분야일수록 도전 정신을 불러 일으킨달까. 퀘스트를 하나씩 깨가는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길도 없는 깜깜한 깊은 산 속에 홀로 있는 기분이지만 어떻게 어떻게 해서 등불 하나를 찾고, 또 어떻게 어떻게 해서 길을 찾다 보니, 어느새 동이 트고 주변이 훤해지고, 마을로 내려가는 그런 과정이 반복된다. 산을 내려오는 그 기분이 대단히 큰 짜릿함을 안겨준다. 새로운 시야가 트이는 순간이다.
그렇게 해서 하게 된 어려운 주제 베스트 3를 꼽는다면 고대 불상, 원효대사 판비량론, 첨단바이오의약품 규제였다. 프리랜서를 생각하는 후배들에게 약간의 시사점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3대 어려웠던 통역 이야기를 뒷 장에서 간략하게 소개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