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듀이와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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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영광

오후 4시, 동네 농구장입니다.


열두 살짜리 아이가 슛을 쏩니다. 공이 손을 떠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갑니다. 림에 맞고 튕겨 나옵니다. 아이가 다시 잡습니다. 각도를 조금 낮추고, 팔의 힘을 살짝 줄입니다. 다시 쏩니다. 이번에는 들어갑니다.


이 아이는 미적분을 모릅니다. 포물선의 방정식도, 중력가속도 9.8m/s²도 모릅니다. 하지만 몸은 알고 있습니다. 각도와 힘의 관계를, 공기 저항의 감각을, 최적의 궤적을 근육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교실로 가봅니다.


교과서 72쪽. "포물선 운동: y = v₀t sinθ − ½gt²." 교사가 칠판에 공식을 씁니다. 30명이 받아 적습니다. 시험지에 숫자를 대입합니다. 90점. 상위 10%. 부모님은 만족합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공이 왜 그렇게 날아가는지 '느끼지' 못합니다. 시험 다음 날이면 공식은 증발합니다. 다시 외웁니다. 다시 증발합니다. 12년간.


시험지 위의 포물선과 농구공의 궤적이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이 학생은 졸업할 때까지 연결하지 못합니다. 교실과 삶 사이에 유리벽이 있습니다. 보이지만 닿지 않습니다.


100년 전, 한 철학자가 이 유리벽을 정확히 짚었습니다. 존 듀이.


1897년 《나의 교육학적 신조》에서 그는 선언했습니다. "교육은 삶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다."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이 교실 밖의 삶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라고. 개를 훈련시키듯 아이를 훈련시키는 것이라고. 거친 비유였지만 정곡을 찔렀습니다.


1938년 《경험과 교육》에서는 더 날카로워졌습니다. "전통 교육의 근본 문제는 학생의 경험을 무시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빈 그릇을 들고 교실에 오지 않습니다. 이미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옵니다. 문제는 교실이 그 경험을 무시한 채, 위에서 지식을 부어넣으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듀이의 핵심 원칙은 간단했습니다.


아이의 일상에서 시작하라. 농구를 하는 아이에게 포물선을 가르치고, 요리를 하는 아이에게 화학을 가르치고, 용돈을 관리하는 아이에게 통계를 가르쳐라. 추상적인 공식을 먼저 주고 현실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경험을 먼저 주고 그 안에서 공식을 발견하게 하라.


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생에게 배울 것을 주지 말고, 할 것을 주어라. 그 행위가 사고를 요구하는 성질의 것이면, 배움은 저절로 따라온다." 행함으로써 배운다. 'learning by doing'이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그의 철학입니다.


듀이에게 교육이란 지식의 전달이 아니었습니다. '경험의 재구성'이었습니다. "성장에 있어서 기존의 경험과 새로운 경험 사이의 관련을 구축하는 일, 이것이 언제나 교사가 명심해야 할 표어가 되어야만 한다." 이미 가진 것과 새로 배울 것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 그것이 교사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아름다운 이론이었습니다.


듀이는 시카고 대학에 실험학교(Laboratory School)를 세우고 직접 실천했습니다. 1896년 문을 연 이 학교에서, 아이들은 요리하면서 분수를 배웠고, 정원을 가꾸면서 생물학을 배웠고, 목공을 하면서 기하학을 배웠습니다. 효과는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실험학교 밖에서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교사 한 명이 30명의 아이를 앞에 두고, 한 아이에게는 농구로, 다른 아이에게는 요리로, 또 다른 아이에게는 게임으로 포물선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블룸의 2시그마 문제와 같은 구조입니다. 효과적인 것은 아는데 물리적으로 실현할 수 없는 이상. 열정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 한계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협했습니다.


듀이가 8년 만에 실험학교를 떠나야 했다는 사실이 상징적입니다. 이상은 아름다웠지만, 현실은 30명을 한 교실에 넣어야 했습니다. 모든 아이에게 같은 교과서, 같은 공식, 같은 문제를 줬습니다. 경험은 빼고 결론만 남겼습니다.


포물선의 느낌 대신 포물선의 공식을. 화학 반응의 신비 대신 화학 반응식을. 숲의 냄새 대신 광합성의 화학식을.


효율적이었습니다. 측정 가능했습니다. 시험지 위에서는 완벽하게 작동했습니다. 하지만 듀이가 경고한 대로, 삶과 단절된 교육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시험을 위해 배우고, 시험이 끝나면 잊었습니다. 배움이 삶과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같은 방향으로 달리지만 영원히 만나지 않는 두 직선처럼.


시카고 대학의 인지과학자 시앙 베일록(Sian Beilock)이 실험 하나를 합니다.


운동 경험이 있는 학생과 없는 학생에게 물리학 문제를 풀게 했습니다. 뇌 영상을 촬영했습니다.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농구나 하키 같은 운동 경험이 있는 학생은, 포물선 운동 문제를 풀 때 운동 피질까지 활성화되었습니다. 몸이 알고 있는 것을 뇌가 가져다 쓴 것입니다. 효과 크기 d=0.35~0.60. 교육학에서 의미 있는 수준입니다. 6개월 후 재검사에서도 효과는 유지되었습니다.


이 결과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십시오. 같은 문제, 같은 시험지입니다. 그런데 몸으로 경험한 아이의 뇌는 다른 경로로 답에 도달합니다. 교과서만 읽은 아이가 전두엽 하나로 문제를 풀 때, 운동 경험이 있는 아이는 전두엽과 운동 피질이 함께 작동합니다. 두 개의 엔진으로 달리는 셈입니다.


경험은 단순한 동기 부여가 아닙니다. 인지 자체를 바꿉니다.


농구공을 던져본 아이는 포물선을 '다른 뇌'로 이해합니다.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을 관찰한 아이는 상전이를 '다른 감각'으로 이해합니다. 레고를 조립해본 아이는 구조역학을 '다른 손'으로 이해합니다.


인지과학은 이것을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라 부릅니다. 마음은 뇌에만 있지 않습니다. 몸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시작한 지식은 교과서에 머뭅니다. 경험에서 시작한 지식은 몸에 새겨집니다.


듀이에게는 이것을 증명할 뇌 영상 기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100년 전에 이미 직관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경험이 먼저이고, 추상은 그 위에 올라간다고. 뿌리 없는 나무가 서지 못하듯, 경험 없는 지식은 뿌리가 없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바람에 날아가는 낙엽.


한국 교육은 이것을 정확히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추상이 먼저이고, 경험은 '나중에.' 초등학교 3학년부터 시작되는 학원 순례에서, 아이들은 경험을 건너뛰고 바로 공식으로 직행합니다. 문제 유형을 외우는 기술은 늘지만 이해는 얕아집니다. 그리고 그 '나중에'는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초등에서 중등으로, 중등에서 고등으로 — 항상 다음 시험이 있고, 항상 시간이 부족합니다.


PISA 평가에서 한국 학생은 절차적 계산 문항에서 세계 최상위를 기록합니다. 하지만 실생활 적용 문항에서는 순위가 눈에 띄게 떨어집니다. 공식은 외웠지만, 현실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연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78.5%의 학생이 사교육을 받습니다(2023년 기준). 초등학생은 86%에 달합니다. 그런데 이 막대한 투자가 만들어내는 것은 절차적 능력이지, 전이 능력이 아닙니다.


시험지 위에서는 세계 1위인데, 시험지 밖에서는 그 지식을 쓸 줄 모릅니다. 페라리를 사서 주차장에만 세워두는 셈입니다. 이것은 아이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경험 없이 결론만 주입하는 시스템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한국 사교육비 총액은 연간 27조 원을 넘겼습니다. 이 돈이 경험을 사는 데 쓰이고 있다면 괜찮겠지만, 대부분은 절차적 반복 — 문제 유형 암기, 공식 반복 — 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투자 대비 전이 능력이 낮은 교육에, 세계 최고 수준의 비용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엔지니어로 일하던 시절, 비슷한 것을 봤습니다.


통신공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신입이 실제 안테나 설계 앞에서는 한참을 헤맸습니다. 교과서의 이론과 장비 앞에서의 감각 사이에 간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현장 경험이 풍부한 기술자는 이론은 약해도 문제를 직관으로 풀었습니다. 경험의 힘이었습니다.


물론 둘 다 필요합니다. 이론과 경험, 추상과 구체. 하지만 순서가 중요합니다. 경험이 질문을 만들고, 이론이 답을 줍니다. 질문 없이 받는 답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교육은 답을 먼저 주고 질문은 나중에 — 아니, 질문은 아예 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정해진 답만 외우라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듀이가 100년 전에 던진 이 질문에, 100년간 아무도 답하지 못했습니다. 경험 교육이 좋다는 것은 다 압니다. 문제는 방법이었습니다.


AI가 여기서 등장합니다.


AI는 1:1 교육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1:1이 되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좋은 교육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1:1로 공식을 주입하면, 더 효율적인 주입일 뿐입니다. AI가 진짜 바꾸는 것은 이것입니다. 한 아이의 일상에서 출발해서, 그 아이만의 경험을 학문과 연결하는 것.


농구를 좋아하는 열두 살 민준이에게 AI가 묻습니다. "네가 3점 슛을 쏠 때, 공이 가장 높이 올라가는 지점은 어디쯤일 것 같아?" 민준이가 생각합니다. "음… 중간쯤?" AI가 다시 묻습니다. "좋아. 그럼 공이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림에 닿는 순간까지, 공의 높이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래프로 그려볼 수 있을까?" 민준이가 종이에 곡선을 그립니다. AI가 말합니다. "이 곡선, 수학에서 이름이 있어. 포물선이라고 해."


농구장에서 시작한 호기심이 미적분의 문 앞까지 아이를 데려간 것입니다. 교과서 72쪽의 공식이 아니라, 자기 손에서 떠난 공의 궤적이 출발점이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서연이에게는 다르게 접근합니다. "왜 소금을 넣으면 얼음이 더 차가워질까? 아이스크림 만들 때 소금을 쓰잖아." 레고를 좋아하는 지호에게는 또 다릅니다. "이 구조물이 쓰러지지 않으려면 무게 중심이 어디 있어야 할까? 에펠탑은 왜 안 쓰러질까?"


같은 물리학, 같은 화학, 같은 수학입니다. 하지만 진입로가 다릅니다. 30명에게 같은 교과서를 줄 수밖에 없었던 교실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AI는 30개의 다른 진입로를 만들 수 있습니다. 300개도 가능합니다.

아이의 관심사가 진입로이고, AI가 그 관심사에서 학문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습니다.


여기서 하워드 가드너의 통찰이 중요해집니다.


가드너는 지능을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라 정의했습니다. 핵심은 '중요한 문제'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바뀌면 중요한 문제가 바뀝니다. 중요한 문제가 바뀌면 필요한 지능이 바뀝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신체적 힘과 자연을 읽는 감각이 지능이었습니다. 산업 사회에서는 절차를 따르고 시스템을 운용하는 능력이 지능이었습니다. 지식 사회에서는 정보를 조직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지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AI가 지식의 조직과 분석을 대신하는 시대에는 무엇이 지능이 됩니까. 또 달라질 것입니다.


가드너의 정의가 강력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시험지 위의 점수가 아니라, 지금 이 사회가 요구하는 문제 해결 능력. 그것이 진짜 지능입니다. 그리고 그 지능은, 교과서가 아니라 삶 속에서 자랍니다.


저도 이것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삐삐(페이저)를 만들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사회 초년생에게 무척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전파를 더 잘 수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고, 그 방정식이 '수열'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학의 정석을 다시 펼쳤습니다.


제 생에 처음으로, 수학이 내 삶에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를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시험을 위한 수학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물건을 위한 수학. 경험이 질문을 만들고, 질문이 수학을 불러온 것입니다.


D.LAB과 WMS를 시작할 때, 이 경험을 교육에 적용하려 했습니다.


학생들이 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관련되는 수학과 국어를 프로젝트에 연결하여 가르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벽에 부딪혔습니다. 교과 선생님이 모든 아이의 프로젝트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한다 해도 각각에 맞는 교육 콘텐츠를 만들 시간과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30명의 아이에게 30개의 다른 다리를 놓는 것은, 매우 창의적인 역량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듀이의 꿈이 현실에서 부서진 순간이었습니다.


생성 AI가 이 벽을 허물었습니다. 거의 모든 전공에서 석사에서 박사 사이의 지식 수준을 가진 AI는, 어떤 두 영역이든 연결할 수 있습니다. 학생 한 명 한 명의 경험과 학문 사이에 다리를, 실시간으로, 무한히 놓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콘텐츠를 검증하고 피드백을 주는 코치로 전환됩니다. 듀이가 100년 전에 꿈꿨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멈춰야 했던 것을, 우리는 이제 실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WMS에서 한 학생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건 진짜 저한테만 맞춰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왕족의 자녀에게나 가능했던 맞춤 교육이, 이제 모든 아이에게 열렸습니다.


D.LAB에서 금요일 AI 수업을 운영하면서 직접 목격한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AI와 대화하면서 발견한 것들을 서로 공유할 때, 교실에 전에 없던 에너지가 흘렀습니다. "나는 이렇게 풀었는데, 너는 어떻게 풀었어?" 교과서에 적힌 정답의 공유가 아니었습니다. 경험의 공유였습니다. 같은 개념을 서로 다른 경로로 발견한 아이들이, 자기 경험을 나누면서 이해가 두 배로 깊어지는 순간. 듀이가 100년 전에 실험학교에서 만들려 했던 바로 그 장면이었습니다.


프로젝트 기반 학습(PBL)의 효과를 분석한 메타 연구들이 있습니다.


70개 이상의 연구를 종합한 결과, PBL의 전체 효과 크기는 d=0.65 수준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성과의 종류입니다. 표준화된 시험에서의 향상은 상대적으로 작았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실망스럽습니다. 하지만 전이 과제 — 배운 것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는 능력 — 에서는 효과가 훨씬 컸습니다.


시험 성적은 비슷한데,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확연히 강합니다. 시험을 위한 교육과 삶을 위한 교육의 차이가 숫자로 드러난 것입니다. 아이가 살아갈 30년, 50년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말했습니다. "정보는 차이를 만드는 차이다."


교과서의 공식은 정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의 삶에서 차이를 만들지 못하면, 죽은 정보입니다. 시험지 위에서만 잠깐 살아 있다가 사라지는 유령.


농구공의 궤적에서 발견한 포물선은 다릅니다. 차이를 만드는 차이입니다. 민준이는 이제 슛을 쏠 때마다 포물선을 느낍니다. 서연이는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마다 분자의 운동을 상상합니다. 지식이 삶에 스며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방향의 문제입니다.


교과서에서 삶으로 갈 것인가, 삶에서 교과서로 갈 것인가. 전자는 260년간 우리가 해온 방식입니다. 후자는 소크라테스가 했던 방식이고, 듀이가 꿈꿨던 방식이고, AI가 가능하게 한 방식입니다. 농구공에서 미적분으로, 아이스크림에서 화학으로, 게임에서 프로그래밍으로.


260년간 우리는 교과서에서 삶으로 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 길은 좁고 어두웠습니다. 대부분의 아이가 중간에 포기했습니다. 삶에서 교과서로 가는 길은 넓고, 밝고, 아이 자신의 경험이 입구입니다.

다시 오후 4시의 농구장으로 돌아갑니다.


열두 살 아이가 슛을 쏩니다.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림을 통과합니다. 이 아이는 아직 미적분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아이의 몸속에는 이미 미적분의 씨앗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교과서가 아닙니다. 그 씨앗을 발견해줄 누군가입니다. "이 공이 왜 그렇게 날아가는지 궁금하지 않아?"


100년 전에는 듀이의 실험학교에서만 가능했던 질문이, 이제 모든 농구장에서, 모든 부엌에서, 모든 놀이터에서 가능해졌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교과서가 되고, 아이의 모든 경험이 수업이 됩니다.


듀이가 살아 있다면, 이 장면을 보고 무어라 했을까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100년이 걸렸지만, 마침내."


아이의 일상이 교실이 되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지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느끼는'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벚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바다의 파도를 보고 무한을 감각하는 순간. 감동이 학습이 되는 과정입니다. 경험보다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배움. 그것이 다음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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