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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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영광

4월의 판교, 운중천입니다. 오후 5시. 골든아워의 빛이 수면 위에 부서집니다.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며 물 위에 내려앉습니다.


꽃잎이 물살을 따라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해집니다. 아름답습니다. 그냥 아름답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순간.


그런데 문득 질문이 떠오릅니다. 왜 이 장면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벚꽃은 그냥 나무에서 떨어진 꽃잎입니다. 분자로 분해하면 셀룰로오스와 안토시아닌의 조합. 물은 중력에 의해 흐르는 액체입니다. H₂O 분자의 집합. 빛은 태양에서 온 전자기파입니다. 파장 580~620나노미터.


그런데 이 셋이 만나는 순간, 인간은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화학식과 물리량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다름'입니다. 내가 기대한 것과 실제 경험 사이의 간극. 설명되지 않는 것. 이상한 것. 모든 학습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교과서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삶에서 감지하는 다름에서 시작됩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1972년 《정신의 생태학으로의 단계》에서 말했습니다. "정보는 차이를 만드는 차이다."


모든 차이가 학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학습자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차이, 경험의 흐름을 멈추게 하고 다시 보게 만드는 차이. 그것이 학습의 최소 단위입니다.


교과서에 적힌 '빛의 파장: 580~620nm'는 정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삶에서 어떤 차이도 만들지 못합니다. 골든아워의 빛이 벚꽃잎에 닿는 순간을 직접 본 아이에게, 그 파장의 수치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아, 그래서 이 빛이 이렇게 따뜻한 거구나."


차이를 만드는 차이. 느낌이 앎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 다름을 감지한 순간, AI에게 물었습니다. "이 장면이 왜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까?"


진화심리학, 뇌과학, 복원 이론, 미학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꽃이 피는 것은 풍요의 신호였다는 것. 흐르는 물은 깨끗한 수원의 징표였다는 것. 골든아워의 빛 아래 벚꽃과 물이 만나는 풍경은, 수만 년간 인류의 생존 본능이 '여기는 안전하다'라고 말해온 장면이라는 것.


뇌의 복측피개영역에서 도파민이 만들어져 측좌핵으로 전달되고, 뮤오피오이드 수용체가 엔도르핀과 만나 가슴이 뭉클해지는 평온함을 만든다는 것.


도파민은 "와, 이거 좋은데 더 보고 싶어"라는 신호입니다. 엔도르핀은 "세상이 참 따뜻하고 평화롭네"라는 감각입니다. 이 둘이 동시에 터지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뭉클함의 정체였습니다.


"정말 그래? 도파민은 게임할 때만 나오는 거 아니야?"


질문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러면 왜 바퀴벌레를 볼 때는 안 아름다워?" "아름다움이라는 감각은 생존 본능만으로 설명이 되는 거야? 너무 억지 아니야?"


여기서 갈래가 나뉩니다. 창조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분이 만든 세상의 조화를 영혼으로 느끼고 감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시대와 문화에 따라 아름다움의 기준이 바뀝니다.


진화심리학에서 신학으로, 신학에서 미학으로, 미학에서 사회학으로 넘어갔습니다. 한 번의 산책이, 한 권의 교과서보다 더 많은 학문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것이 현상 기반 학습입니다. 교과서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내가 경험한 현상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뿌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갑니다. 물리학으로, 생물학으로, 심리학으로, 철학으로.


리좀처럼.


뿌리줄기 식물이 땅 밑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듯, 하나의 경험이 수십 개의 학문적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교과서에서는 이것들이 각각 다른 과목이고, 다른 시험이고, 다른 점수입니다. 물리 80점, 생물 75점, 심리 미이수. 하지만 벚꽃 아래에서는 하나입니다. 세상은 원래 하나인데, 교실이 그것을 잘게 쪼갰을 뿐입니다.


이 과정은 네 단계를 거칩니다.


첫째, 다름의 감지.

일상 속에서 예상과 다른 장면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벚꽃이 아름다운데 왜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쿠키를 구웠는데 가장자리만 탔다. 게임에서 같은 자원을 가졌는데 결과가 달라졌다. 이 '이상함'이 학습의 씨앗입니다.


둘째, 질문을 통한 언어화.

감지된 다름은 아직 느낌에 가깝습니다. 이 느낌을 들고 AI에게 묻습니다. "이게 왜 이러지?" "왜 이렇게 느껴지지?" "이거 왜 다른 거야?" 막연한 느낌이 질문이 됩니다. AI가 답하고, 그 답에서 또 질문이 생기고, 대화가 꼬리를 물면서 느낌이 서술 가능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셋째, 개념적 번역.

대화 속에서 일상의 언어가 학문의 언어와 만납니다. AI는 아이의 서술을 교과 용어로 기계적으로 치환하지 않습니다. 경험의 맥락을 보존한 채, 관련 개념을 제안하고, 서로 다른 개념들 사이의 연결을 보여줍니다. 번역자이면서 연결자입니다.


넷째, 성찰적 재구성.

새롭게 획득한 개념을 다시 자신의 경험에 적용합니다. 처음에는 "이상했다"고 느꼈던 장면이, 구조, 반응, 관계, 상징의 언어로 다시 읽힙니다. 학습은 차이의 감지에서 시작해, 개념의 획득을 거쳐,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순환입니다.


이 네 단계가 작동하는 장면을 봅니다.


축구.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동네 축구를 합니다. 오른쪽 풀백이 공을 쫓아 올라갔습니다. 수비 라인의 간격이 무너지자 전체 진형이 흔들립니다.


'다름'이 감지됩니다. 한 명이 잘못했는데 왜 전체가 무너지지?


아이가 AI에게 묻습니다. AI가 답합니다. 축구에서 한 명이 자리를 비우면 옆 선수가 그 공간을 메워야 하고, 그 선수가 이동하면 또 다른 빈 공간이 생깁니다. 도미노처럼 빈자리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것.


"그러면 축구 말고 다른 데서도 이런 일이 있어?" 아이가 다시 묻습니다.


AI가 회사 조직, 가족 안에서의 역할 분담, 도시의 교통 체계로 이야기를 넓힙니다. 한 사람의 움직임이 전체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것. 사회학에서는 이것을 사회 구조와 상호조정이라고 부릅니다.


아이는 존 로크를 모릅니다. 하지만 로크가 설명하려 했던 사회 계약을 온몸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베이킹.

아이가 쿠키 반죽을 오븐에 넣습니다. 180도에서 12분. 꺼냈더니 가장자리가 타고 가운데가 안 익었습니다.

'다름'입니다. 같은 온도인데 왜 다르게 익지?


AI에게 묻습니다. AI가 설명합니다. 열은 바깥에서 안으로 천천히 이동합니다. 가장자리는 열을 오래 받고, 가운데는 아직 열이 도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쿠키를 더 작게 만들면 골고루 익어?" 아이가 다시 묻습니다. 맞습니다. 크기와 열전도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아이의 코가 반응합니다. "근데 쿠키가 갈색으로 변하면서 이 냄새가 나는 건 왜야?"


이것은 마이야르 반응입니다. 1912년 프랑스 화학자 루이-카미유 마이야르가 발견한 아미노산과 환원당의 반응. 열이 닿으면 재료 안의 아미노산과 당이 결합하면서 갈색이 되고, 동시에 수백 가지 향기 분자가 만들어집니다.


교과서에서는 '단백질의 열변성'이라는 건조한 단어로 등장하지만, 아이에게는 쿠키를 구울 때마다 코끝에 닿는 그 향기로 각인됩니다.


열전도에서 식품화학으로, 물리학에서 생화학으로. 쿠키 하나가 두 과목의 문을 열었습니다.


게임.

마인크래프트에서 다이아몬드 곡괭이의 가격이 왜 철 곡괭이보다 비쌉니까.


'다름'입니다. 같은 곡괭인데 왜 값이 다르지?


아이가 AI에게 묻습니다. AI가 답합니다. 다이아몬드는 깊은 곳에서만 나오고, 캐는 데 시간과 장비가 필요합니다. 구하기 어려울수록 값이 올라갑니다.


"그러면 초반에 다이아몬드를 다 써버리면 어떻게 돼?"


나중에 더 비싼 값을 치러야 합니다. 지금 쓰는 것이 나중에 못 쓰는 것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기회비용입니다.


희소성, 수요와 공급, 기회비용. 아이는 경제학 원론의 첫 세 챕터를 게임 안에서 체화합니다.


팬덤.

열세 살 K-pop 팬이 아이돌의 뮤직비디오를 분석하고, 팬 아트를 그리고, 해외 팬과 소통하려고 영어를 배웁니다. 문득 의문이 듭니다.


나는 이 사람을 만난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강한 감정을 느끼지?


AI에게 묻습니다. AI가 설명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준사회적 상호작용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만나지 않아도 미디어를 통해 친밀감을 형성하는 현상입니다.


"그러면 옛날 사람들도 이랬어?" 아이가 묻습니다.

비슷합니다. 종교 지도자, 왕, 영웅에게도 같은 감정이 작동했습니다. 대화는 정체성과 소속감의 구조로, 하위문화의 형성으로, 기호학과 서사학으로 뻗어나갑니다.


어떤 학원도, 어떤 교과서도 이 동기를 만들어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 이론이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가드너는 1983년 인간의 지능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라고 주장했습니다. 언어, 논리-수학, 음악, 신체-운동, 공간, 대인관계, 자기이해. 일곱 가지. 이후 1995년 자연탐구 지능을 추가해 여덟으로 늘었습니다.


이 이론이 교육 현장에서 흔히 "아이마다 잘하는 게 다르다"는 의미로 소비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원래 가드너가 말하려 했던 것은 더 깊습니다.


같은 세상을 경험해도, 아이마다 감지하는 '다름'이 다릅니다. 축구장에서 진형의 붕괴를 포착하는 아이가 있고, 공이 휘어지는 궤적에 매료되는 아이가 있습니다. 같은 벚꽃 아래 서 있어도, 빛의 파장에 끌리는 아이와 꽃잎이 물에 닿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아이가 있습니다.


다중지능은 능력의 분류가 아니라, 다름을 감지하는 채널의 다양성입니다.

교과서는 한 채널만 켭니다. 텍스트. 글자. 읽고 외우기. AI는 아이가 가진 고유한 채널을 통해 세상과 대화하게 합니다.


네 가지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같습니다. 일상의 다름에서 출발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학문적 탐구. 교과서가 정해준 길이 아니라, 아이 자신의 경험이 열어주는 길입니다.


WMS에는 '액체 교과서'라는 수업이 있습니다. 커리큘럼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교과서가 없습니다. 대신 학생과 코치와 AI, 이 셋이 함께 대화합니다. 아이들의 경험과 궁금증이 커리큘럼이 됩니다.


고체가 아니라 액체. 정해진 형태 없이,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교과서입니다.


이 수업에서 중학교 3학년 온유가 AI에게 물었습니다.


"마이크는 어떻게 소리를 이렇게 크게 만드는 거야?"


다름의 감지입니다. 내 목소리는 작은데 스피커에서는 크게 나온다. 이상합니다.


AI가 답합니다. "마이크는 소리를 키우는 게 아니라, 소리를 전기 신호로 바꾸는 장치야."


온유가 다시 묻습니다. "전기 신호로 바꾼다고? 어떻게?"


AI가 설명합니다. 성대가 떨리면 공기가 진동하고, 그 진동이 마이크 안의 얇은 막을 흔들고, 그 움직임이 전기 신호를 만든다고. 전자기 유도라는 원리입니다.


"그러면 그 전기 신호가 스피커에서 다시 소리로 바뀌는 거야?"


맞습니다. 이때 트랜지스터라는 부품이 전기 신호를 증폭합니다. 에미터, 베이스, 컬렉터. 세 개의 다리를 가진 작은 부품이 약한 신호를 강한 신호로 바꿉니다.


온유의 눈이 커졌습니다. "그거 반도체 아니야?"


맞습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전기차 안에 들어 있는 그 반도체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트랜지스터입니다.


한 시간 만에 음성학에서 전자기학까지, 물리학에서 반도체 공학까지 건너갔습니다. 마이크 하나에서. 리좀입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것입니다.


같은 수업에서 다른 학생이 물었습니다. "공룡을 다시 만들 수 있을까?"


다름의 감지입니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는 호박 속 모기에서 공룡 DNA를 뽑아 부활시킵니다. 근데 현실에서는 왜 안 되지?


AI에게 묻습니다. AI가 답합니다. DNA는 시간이 지나면 끊어집니다. 반감기가 521년입니다. 521년마다 절반이 파괴됩니다. 모든 결합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는 약 680만 년.


아이의 눈이 커졌습니다. "잠깐, 공룡이 멸종한 게 6,600만 년 전이면... 열 번도 넘게 유통기한이 지난 거잖아!"


그렇습니다. DNA가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정말 방법이 아예 없어?" 아이가 다시 묻습니다.


AI가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돌로의 법칙—한번 멸종한 종은 되살릴 수 없다는 원칙—이 있지만, 수렴 진화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닭은 공룡의 후손입니다. 닭의 유전자 중에 잠자고 있는 공룡의 유전자를 깨우면 어떨까?


여기서 야마나카 인자가 등장합니다. 세포를 되돌리는 기술. 2012년 노벨상을 받은 연구입니다.


공룡 하나에서 고생물학, 분자생물학, 유전학, 첨단 의학이 동시에 열렸습니다. 아이가 던진 한 줄의 질문에서.


코치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정말 궁금한 게 뭐야?"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아이들이 올린 질문입니다.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면 진짜 시간이 거꾸로 갈까?"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도 인간은 깊은 사고를 할 수 있을까?"

"사랑을 정의할 수 있을까?"

"신은 자신이 들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있는가?"


초등학생이 상대성이론을 묻고, 중학생이 언어철학을 건드리고, 고등학생이 존재론적 역설을 던집니다. 어떤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질문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학습의 본래 모습입니다.


여기서 핵심이 드러납니다.


텍스트가 아니라 컨텍스트입니다.


교과서는 고정돼 있습니다. 배워야 할 것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구텐베르크 이후 인쇄 매체가 만들어낸 구조입니다. 대량으로 같은 내용을 찍어낼 수 있게 되었을 때, 교육도 대량 생산의 논리를 따랐습니다. 같은 책, 같은 순서, 같은 시험. 효율적이었습니다. 산업화 시대에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 책이 담고 있는 지적 범위는, 인쇄된 글자의 논리와 지식에 한정됩니다.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자신이 전공한 분야에서만 전문가입니다. 수학 교사는 아이가 쿠키를 굽다가 던진 열전도 질문에 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이 마이야르 반응으로, 다시 프랑스 식품화학의 역사로 뻗어나가면, 교과서 밖의 영역입니다. 교과서라는 매체가 가진 구조적 한계입니다.


교과서는 아이의 삶과 분리돼 있습니다. 아이가 교과서의 세계로 건너가야 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고정된 텍스트의 세계로.


AI가 이 구조를 뒤집습니다.


아이의 경험에서 출발합니다. 아이의 궁금증이 커리큘럼이 됩니다. 거의 모든 전공에서 석사에서 박사 사이의 지식 수준을 가진 AI는, 어떤 두 영역이든 연결할 수 있습니다. 마이크에서 반도체로, 공룡에서 텔로미어로, 벚꽃에서 진화심리학으로.


컨텍스트가 텍스트를 대신합니다. 삶의 맥락이 교과서를 대신합니다. 교사는 아이들 사이에서 질문을 큐레이션하고, 방향을 잡아주는 코치가 됩니다.


비고츠키가 말한 근접발달영역이 여기서 작동합니다.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과, 도움을 받아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격. 비고츠키는 이 간격을 좁혀주는 존재를 '더 유능한 동료'라고 불렀습니다. 교사, 부모, 형, 누나.


하지만 현실에서 이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입니다. 물리학 질문에는 물리 선생님이, 심리학 질문에는 심리 상담사가 필요합니다. 아이의 질문이 과목의 경계를 넘는 순간, 더 유능한 동료를 찾기 어려워집니다.


AI는 이 제약을 해제합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석사에서 박사 사이의 지식을 가진 AI는, 아이의 질문이 어디로 뻗어나가든 따라갈 수 있습니다. 스캐폴딩—건축 현장의 비계처럼, 아이가 혼자 올라가지 못하는 높이에 발판을 놓아주는 것—을 실시간으로 제공합니다.


비고츠키가 구분한 '일상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 사이의 다리를 놓습니다. 아이의 서툴고 파편적인 경험 언어를, 질문과 대화를 통해 학문적 언어로 확장합니다.


"왜 갑자기 맛이 달라졌지?"가 마이야르 반응이 됩니다.


"왜 팀이 무너졌지?"가 사회 구조론이 됩니다.


"왜 이 장면이 아름답지?"가 진화심리학이 됩니다.


AI는 답을 주는 기계가 아닙니다. 일상어를 학문어로 번역하는 매개자입니다. 아이의 느낌을 지식의 언어로 옮겨주는 통역사입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학습 방법에 더 가깝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젊은이들과 대화했습니다. 교실이 없었습니다. 커리큘럼이 없었습니다. 시장 바닥에 앉아서 이야기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삶에서 마주친 질문이 교재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답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던졌습니다. 상대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씩 뒤집어,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산파술입니다.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안에 이미 있는 것을 끌어내는 것.


근대 공교육은 이 방법을 포기했습니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소크라테스가 한 번에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소수입니다. 수백만 명의 아이를 가르쳐야 하는 산업화 시대에, 1대1 대화는 사치였습니다. 인쇄 매체가 만든 교과서가 소크라테스를 대체했습니다. 효율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삶과 단절되었습니다.


AI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모든 아이에게 돌려줍니다. 모든 아이 곁에 소크라테스 한 명씩.


"사람은 왜 사는가."


액체 교과서 수업에서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올린 한 줄입니다. 어떤 교과목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험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평생 물었던 질문이고,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진정으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하나뿐이다"라고 선언하며 파고들었던 질문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교과서는 침묵합니다. 국어 교과서에도, 도덕 교과서에도 이 질문에 대한 챕터는 없습니다. 하지만 AI 앞에서 이 질문은 철학으로, 신학으로, 진화생물학으로, 실존주의 문학으로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아이가 원하는 방향으로.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깊이로.


리좀의 끝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아이가 멈추는 곳이 끝입니다. 아이가 다시 시작하는 곳이 새로운 시작입니다.


아이가 이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교육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삶에서 시작해 학문으로 뻗어나가고,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순환. 교과서가 아니라 경험이 교재가 되는 학습. 벚꽃 아래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결국 교육의 가장 오래된 원형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다름의 인식에서 시작된 학습이 사방으로 뻗어나갈 때, AI는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해주는 것.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 그것이 다음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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