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함은 계획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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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영광

2016년 3월 10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


알파고와 이세돌의 2국이 진행되던 그 순간, 해설자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중계를 보던 전 세계 프로 기사들이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었습니다.


"저건 뭐지?"


알파고의 37수. 흰돌이 놓인 자리는 바둑판 우변 다섯째 줄이었습니다. 어깨짚기. 프로기사라면 초반에 그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세력을 넓히기엔 너무 안쪽이고, 실리를 잡기엔 너무 바깥입니다. 어중간한 자리. 중계실의 공기가 멈췄습니다. 해설을 맡은 프로기사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세돌 9단이 의자에서 일어나 대국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담배를 태우고 돌아왔을 때, 표정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파고가 이겼습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수가, 판을 결정지은 한 수였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알파고는 '3-3 침입'도 태연하게 두었습니다. 바둑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듣는 말이 있습니다. 초반에 3-3에 두면 안 된다고. 한국, 중국, 일본의 프로기사들이 수백 년간 합의한 금기였습니다. 이세돌 9단 자신도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워, 프로가 된 뒤에도 단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파고가 두었고, 그것이 좋은 수라는 것을 증명해냈습니다.


인간이 '틀린 수'라고 믿어온 것이 실은 '해보지 않은 수'였을 뿐이라는 것을, 기계가 보여준 순간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왜 중요합니까. 바둑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3-3에 갇혀 삽니다.


"수학은 원래 어려운 거야." "문과는 코딩을 못 해." "50 넘으면 새로운 걸 배우기 힘들어." "우리 애는 원래 이과 체질이 아니야."


'원래'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가능성이 닫힙니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것을 '안 되는 것'으로 분류하고, 그 분류를 진리처럼 믿으며 삽니다. 바둑의 신이라 불리던 사람조차 그랬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기능적 고착이라고 부릅니다. 1945년 카를 둔커가 발견한 인지 편향입니다.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양초 한 개, 압정이 담긴 상자, 성냥 한 갑을 주고 "양초를 벽에 고정해서 불을 켜라"고 했습니다. 대부분 압정으로 양초를 벽에 직접 박으려 했습니다. 정답은 압정 상자를 비우고, 압정으로 빈 상자를 벽에 고정한 뒤, 그 위에 양초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상자는 '압정을 담는 용기'입니다. 그 고착이 풀리지 않으면, 상자가 '선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뇌는 효율을 위해 패턴을 만들고, 그 패턴 안에서 사고합니다. 에너지를 절약해주지만, 동시에 시야를 좁힙니다. 고정관념은 뇌의 에너지 절약 장치입니다. 그리고 그 장치가 때로 가장 좋은 수를 가립니다.


이세돌의 3-3도, 둔커의 압정 상자도, 학부모의 "원래 우리 애는"도 같은 구조입니다. 한 번 만들어진 패턴은, 그것이 틀렸다는 충격을 만나기 전까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알파고에게는 이 장치가 없었습니다. 좁게 볼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세돌 9단의 말입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원래 그래왔어'라는 편견이 없습니다. 오직 이기는 확률만을 계산해 가장 좋은 길을 찾아낼 뿐이죠."


그리고 결정적인 한마디를 더했습니다.


"고정관념이 없으니까, 오히려 더 창의적으로 보이는 겁니다."


역설입니다. AI가 창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AI에게는 창의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편견 없이 가능성을 탐색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인간에게는 '창의적'으로 보입니다. 수백 년간 스스로 차단해온 가능성이었으니까요.


창의성이란 새로운 것을 만드는 능력이 아닙니다. 스스로 쌓은 벽을 허무는 능력입니다.


이세돌의 바둑 인생이 이 역설의 증거입니다.


전남 신안의 작은 섬에서 바둑을 배운 소년에게, 정보란 한 달에 한 번 오는 잡지와 신문 귀퉁이의 기보가 전부였습니다. 귀한 바둑책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외웠습니다. 더 많은 기보를 보려면 서울 종로의 한국기원까지 올라가 손으로 베껴 와야 했습니다. 발품으로 얻은 지식은 뼈에 새겨졌습니다.


하지만 그 뼈에 새겨진 지식 중에 '3-3은 안 된다'도 있었습니다.


깊이 배운 것이 깊이 가두기도 합니다.


인터넷이 등장하며 첫 번째 변화가 왔습니다. 안방에서 세계 최고수의 대국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세돌은 "너무 쉽게 얻으니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줄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검색하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과 같은 구조입니다.


그리고 알파고가 왔습니다.


인터넷이 가져온 변화는, 알파고가 몰고 온 혁명 앞에서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알파고 이후 프로기사들은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AI를 스승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이세돌은 이 상황을 '정답지를 보고 공부하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그 정답지가 기존의 정답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인간이 수백 년간 쌓아온 이론과 정석이 하루아침에 빛을 잃었습니다. AI 이전의 기보는 역사적 가치만 있을 뿐, 기술적으로는 더 이상 참고하지 않습니다.


충격적이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백 년간 축적된 지식이 한 방에 무너지는 경험을. 그 앞에 선 사람의 심정을.


2016년 3월 13일. 4국입니다.


세 판을 연속으로 진 뒤였습니다. 대국실의 분위기는 장례식장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세돌의 얼굴에는 수십 시간의 잠 못 이룬 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2억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바둑의 신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78수. 흑돌이 예상치 못한 곳에 놓였습니다. 대국실을 지키던 프로기사들의 숨이 멎었습니다. 해설자가 침묵했습니다. 알파고의 승률 예측이 요동쳤습니다. 5% 미만이던 이세돌의 예상 승률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판이 뒤집혔습니다.


이세돌이 마지막 돌을 놓는 순간, 대국실 밖에서 함성이 터졌습니다. 세상은 이 수를 '신의 한 수'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이 AI에게 거둔 유일한 승리의 열쇠.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 수는 알파고를 만나기 전의 이세돌이라면 두지 않았을 수입니다. 37수에서 배웠습니다. 고정관념 밖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안 되는 수'라고 믿었던 곳에서 승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3-3의 충격이 78수의 영감을 만든 것입니다. AI에게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법을 배운 인간이, 바로 그 방법으로 AI를 이겼습니다.


"알파고와의 경험이 나를 완전히 다른 기사로 만들었습니다."


이세돌의 말입니다.


수백 년간 쌓인 정석이 하루아침에 빛을 잃었지만,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바둑이 태어났습니다. 알파고 이후, 한국과 중국의 프로기사들은 기존 이론서를 닫고 AI의 기보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포석이 등장했고, 초반 전략이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중국의 커제가 대표적입니다.


"알파고를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던 세계 1위는, 2017년 5월 중국 우전에서 알파고와 맞붙었습니다. 0-3. 완패였습니다. 마지막 대국 후 커제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고통스러운 바둑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 커제는 오히려 AI의 수를 적극 흡수했습니다. 커제의 바둑은 더 대담해졌습니다. 한국의 젊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AI가 보여준 비정통적 수법을 연구하고 변형하면서,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창의적인 대국이 속출했습니다.


3,000년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변화기.


아이러니하게도, 바둑의 황금시대는 AI가 인간을 이긴 뒤에 시작되었습니다. 알파고가 죽인 것은 바둑이 아니라, 바둑계가 수백 년간 쌓아올린 고정관념이었습니다.


바둑에서 일어난 이 변화는, 앞으로 모든 분야에서 반복될 패턴의 예고편입니다. 의학에서, 법률에서, 과학에서, 예술에서. "원래 이렇게 해왔다"고 믿어온 방법론이 AI 앞에서 하나씩 재검토될 것입니다.


바둑이 먼저 겪었을 뿐입니다.


3,000년 된 게임이 가장 먼저 무너진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둑의 규칙이 명확했으니까요. 규칙이 명확한 영역부터 AI가 침투합니다. 하지만 침투가 끝이 아닙니다. 침투 이후에 올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재해석. 바둑이 그랬듯이.


케네스 스탠리가 이 현상을 학문적으로 설명합니다.


센트럴플로리다대학교의 이 인공지능 연구자는 2015년 조엘 레먼과 함께 《위대함은 계획될 수 없다》라는 도발적 제목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핵심 주장은 이렇습니다.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는 것보다, 흥미로운 것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더 위대한 발견이 나온다.


그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안개 낀 강을 건너는 상황을 상상하라고. 맞은편 강둑은 보이지 않습니다. 목표를 정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발밑의 징검돌을 하나씩 밟아 나가는 것뿐입니다. 다음 돌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밟아봐야 압니다.


그가 개발한 '참신성 탐색' 알고리즘은 이 원리를 코드로 구현한 것이었습니다. 정해진 목표 없이 새로운 패턴을 찾는 데 집중했고, 놀랍게도 목표 지향 알고리즘보다 더 복잡하고 흥미로운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목표를 버렸더니, 더 먼 곳에 도달한 것입니다.


교육에 직결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육은 목표 지향적입니다. 수능이라는 목표, 등급이라는 목표, 대학이라는 목표. 정해진 정석을 외우고, 기출문제를 분석하고, 최적 경로를 계산합니다. 바둑의 정석을 외우던 이세돌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둑에서는 정석이 무너졌다고 인정하면서, 교육에서는 여전히 같은 정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탠리의 연구가 말합니다. 일직선이 반드시 최단 거리는 아닙니다. 때로 옆길이 더 먼 곳에 데려다줍니다. 징검돌을 하나씩 밟아가다 보면,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강둑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세돌이 78수를 두었을 때, 그것은 목표 지향적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탐색이었습니다. 고정관념 밖의 영역을 탐험하는 행위. 그 탐험에서 신의 한 수가 나왔습니다.


아이가 "왜 포물선이 꼭 이 모양이어야 해?"라고 묻고, AI가 포물선이 아닌 궤적의 세계를 보여줄 때, 그 아이의 수학은 교과서를 벗어납니다. 정해진 커리큘럼의 경로가 아니라, 궁금증이 이끄는 탐색. 그 탐색이 예상치 못한 깊이에 도달하게 합니다.


명화의 세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글을 잘 쓰고 싶지만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선 하나 제대로 긋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AI와 협업하면 달라집니다. 목표를 세우고 큰 방향성을 AI에게 줍니다. AI가 결과를 만들어오면 평가하고 피드백을 줍니다. 때로는 직접 수정합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결과물이 태어납니다.


AI에게 "반 고흐 스타일로 내 동네를 그려줘"라고 말합니다. AI는 프로방스가 아닌 한국의 골목에 소용돌이치는 붓터치를 입힙니다. 결과를 보는 순간, 눈이 달라집니다.


"아, 이 골목이 이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반 고흐의 눈을 빌려서, 비로소 내 동네를 처음 본 것입니다.


모네의 수련 필터를 씌우면 아파트 단지 연못이 지베르니가 됩니다. 피카소의 손으로 광화문을 해체하면, 매일 지나치던 사거리가 입체파의 조각이 됩니다. 클림트의 금박으로 해운대 밤바다를 감싸면, 부산이 빈의 궁전이 됩니다. 뭉크의 색채로 출근길 지하철을 그리면, 매일 타던 2호선이 실존적 공포의 터널이 됩니다.


매일 지나치던 풍경이 명화가 되는 순간,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의 가치를 다시 봅니다.


이것이 고정관념의 해체입니다. AI가 없었다면, 이 조합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케빈 켈리가 말했습니다.


"기술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는 이런 상상을 제안했습니다. 피아노가 존재하기 전의 모차르트를 떠올려 보라고. 사회는 얼마나 큰 손해를 보겠느냐고.


피아노가 없었다면 모차르트는 자기 안의 음악을 몰랐을 것입니다. 값싼 유화물감이 없었다면 반 고흐는 우울한 목사 지망생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필름 기술이 없었다면 히치콕은 평범한 광고업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수만 명의 아이가 태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을 표현할 기술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채로.

AI는 21세기의 피아노입니다. 모차르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피아노. 하지만 피아노가 모차르트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안에 이미 있던 것을 밖으로 꺼내준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스승이 제자에게 검증된 지식을 전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요리 명장이 "이 나물은 이렇게 무쳐야 한다"고 비법을 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안정적이고 효율적이지만, 스승이 알려준 '정답'의 틀을 벗어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AI와 함께 배우는 아이들은 다른 세상에 놓입니다.


AI는 "이게 정답이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가능성과 그 확률을 눈앞에 펼쳐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정해진 레시피를 외우는 학생이 아니라, 수많은 재료를 조합하며 새로운 맛을 찾아 나서는 탐험가가 됩니다.


이세돌이 겪은 것을, 모든 아이가 교실에서 겪을 수 있습니다. "왜 꼭 이렇게 해야 해?"라는 질문 앞에서 AI가 대안을 펼쳐 보여줄 때, 아이의 세계는 교과서를 넘어섭니다.


두려움도 있습니다.


AI의 정답지만 들여다보며 얕은 지식만 쌓는 아이. '왜'를 묻지 않고 '어떻게'만 배우는 아이. 실패를 통해 배우는 끈기를 잃어버린 아이. 인간 스승이 주는 따뜻한 격려, 눈빛으로 전하는 신뢰, 함께 실패하며 일어서는 경험. 그런 것들을 잃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합리적인 우려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을 봅니다.


우리 세대가 평생 "안 된다"고 배웠던 고정관념의 벽을, 우리 아이들은 처음부터 마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학은 원래 어려운 거야"라고 배운 적 없는 아이가 수학을 대하는 태도가 어떨지 상상해 보십시오. "여자는 코딩을 못 해"라고 들은 적 없는 아이가 코딩을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십시오.


고정관념이 없는 것은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가능성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이세돌이 3-3의 충격에서 78수를 만들어냈듯이, 고정관념 없는 아이들은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세상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부모의 역할도 달라집니다.


정답을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지는 안내자. 아이가 AI의 답을 가져왔을 때, "왜 AI가 그런 답을 줬다고 생각해?" "네 생각은?" 이 한마디면 됩니다. 기술이 채워주지 못하는 것—공감, 격려, 함께 고민하는 시간—은 여전히 부모의 몫입니다.


2019년 11월 19일, 이세돌은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국제 대회 우승 18회, 24년간의 프로기사 생활. 천재 기사의 마지막이었습니다. 하지만 은퇴 인터뷰에 패배의 쓸쓸함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알파고가 보여준 새로운 바둑의 가능성"에 대한 경외가 있었습니다.


이세돌은 졌지만, 바둑은 더 넓어졌습니다. 약해진 것이 아니라 강해졌습니다. 고정관념이라는 갑옷을 벗어던진 뒤에야, 바둑의 진짜 크기를 본 것입니다.


하지만 AI가 깨뜨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세돌이 78수를 두기 전, 세 판을 연달아 지고 인류의 대표라는 무게를 짊어진 채, 이기고 싶다는 간절함이 눈시울을 적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뜨거운 감정 없이 78수는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알파고는 3-3을 둘 수 있었지만, 눈물을 흘리며 바둑을 둘 수는 없었습니다.


계산은 기계가 합니다. 간절함은 인간만이 느낍니다. 간절함이 없는 발견은, 발견은 있되 의미는 없습니다.

이세돌의 눈물은 어디에서 옵니까.


18세기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정서(Affections)라고 불렀습니다. 의지의 성향.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하는가. 무엇을 보고 가슴이 뛰는가. 무엇을 향해 온 존재가 기울어지는가.


이것은 '나'라는 인식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고, 그 느낌에 기울어지는 주체가 있어야 정서가 존재합니다. 알파고에게는 그 '나'가 없습니다. 데이터를 처리할 뿐, 처리하는 자신을 아는 자아가 없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계산하는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정서에 있습니다.


그 정서란 정확히 무엇이며, 왜 AI 시대에 더 중요해지는가. 그 질문이 다음 장의 문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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