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균형의 조화가 역설적으로 심히 아름답다.
(스포성 글이 있습니다.)
1.
'슬랙 베이'는 브루노 뒤몽의 9번째 장편 영화입니다.
글쓰기에 앞서 간략하게 서두를 적어야 할 것 같은데,
브루노 뒤몽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볼 기회가 흔치 않아 브루노 뒤몽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전 작품들이 어떤지 잘 모르기에
길게 글로 써보고 싶었지만
분석적으로 깊게 쓰는게 어려울 것 같아
문단으로 나누어 적어 볼까 합니다.
(구어체로 적는게 더 적합할 것 같아 이렇게 적습니다.
원래는 글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서도 이 영화가 계속 생각나고
곱씹게 되는 것 같아 글로 적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적는 글은 오직 '슬랙 베이'의 관한 내용일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슬랙 베이'는
무척이나 뛰어난 영화입니다.
1-1
현지 평단이나 관람객 평도 그닥 좋은 편이 아닌데,
아스트랄한 코미디가 주는 영화의 정서가
저에게는 만만치 않게 다가옵니다.
(좋지 않은 평가 때문에 이 영화를
더 피력하고 싶은 부분도 있습니다. ^^)
분명 쉽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더더욱이 글로 적어보고 싶네요.
2.
'슬랙 베이'는 1910년 프랑스 북부 지방에
슬랙 만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 소동극 입니다.
이 영화의 제목이 주는 의미심장함도 분명 있는데,
원제가 'Ma Loute'라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Ma Loute'를 번역하면 '나의 사내아이' 혹은
'나의 계집아이'라는 뜻입니다.
('Ma'는 영어로 'My'이고,
'Loute' 'loulou'의 속어 입니다.
사전에서는 여성명사로 뜨기에
영어로는 'bitch'가 될 것 같네요.)
여기에서 뜻하는 '나의 계집'은
극중 '빌리'를 뜻합니다.
빌리는 이 영화를 풀어가는
중요한 테마이자 키워드 이기도 하니까요.
3.
형식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이 영화는 상당히 정교합니다.
겉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설정과
상황들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저에게는 브루노 뒤몽의 연출력이
얼마나 세심하고 정교한지 확인해준 작품입니다.
여기에서는 두 가문과 공권력을 가진 경찰이 나옵니다.
한쪽의 가문은 귀족이라는 점과,
한쪽의 가문은 어부로 살아가는 하층민이라는 점에서
대비가 되고 있지요.
그 중간 지점에 놓여있는 것이 바로 경찰입니다.
3-1
또 하나 중요한 설정은 귀족들의 실종사건입니다.
이 귀족들은 후에 마루트 가족이
일용할 양식으로 쓴다는 점에서도 기괴하게 다가옵니다.
그 다음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귀족 신분과
자본을 위해 근친상간을 한다는 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뜨악하시는 분들도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중세시대만 생각해도 상당부분 유럽의 역사에서
왕족이나 귀족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위해
근친상간을 서슴없이 해왔습니다.
(인간 말고도 피해 종이 있으니 그건 개입니다.)
이 영화 남자 주인공으로 나오는 '앙드레'가
꼽추인 이유는 이러한 유전적인 이유 때문이겠지요.
'빌리' 역시 유전적 피해의 산물입니다.
3-2
귀족과 어부의 계급적인 신분 격차는
이 영화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격차의 의미보다 계급적인 신분 그 자체가 중요하지요.)
사실상 귀족과 어부 심지어 경찰까지
동일선상에서 보고있다고 하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그렇기에 작품이 더 냉정하고 차갑게 다가오는 경향도 있습니다.)
4.
뚱뚱한 경찰로 나오는 '알프레드'를 비롯해
귀족들이 전부 넘어지고 뒹구르는 슬랩스틱은
단지 웃기기 위한 장치만은 아닙니다.
슬랩스틱 자체가 극의 리듬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넘어지고 깨짐으로써 극중 나오는 인물들이
얼마나 부실하고 내실이 없는지를 블랙 코미디로 보여줍니다.
극중 알프레드는 '허탕을 치면 부풀어오른다'라는
말 자체가 주는(비)웃음도 있지만,
이것이 결말부에선 인간군상과 그 세계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사이기도 하지요.
이 영화는 모든 인간들이 허탕을 침으로써
사건이 해결되고 화합하는 이상한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5.
어부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 빈민층은 극도로 가난하기에 어부 외에도
귀족들을 슬랙 만으로 옮겨주는 일을 합니다.
한 사람당 20센트 씩 받는 이 부업은
영화 내외적으로 굉장히 중요합니다.
슬랙 만을 건너기 위해서
밀물에서는 배를 통해 건너가고,
썰물일때는 수심이 얕기 때문에 사람을 업어서 이동합니다.
추측컨데, 이 가족들이 카니발리즘이 된 것에는
이 부업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종종 시체가 떠다녀서 건져 올리는 일까지 했던
어부 부자는 우연찮게 인육을 맛보면서 심심찮게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들은 이를 '고기'라 일컫습니다.)
마루트의 아버지가 '구세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상당한 아이러니와 동시에 당혹감을 안겨줍니다.
의도치 않게 허탕을 침으로써
이 가족들은 새로운 양식과 일거리를 동시에 얻게 됩니다.
6.
귀족들이 침을 뱉는 행위는 조각상에
먼지를 제거해 청소하기 위한 행위였다면,
어부들이 침뱉는 행위는 귀족들을 봄으로써 행해집니다.
경찰들을 통해 나체족들의 음모까지 보여줬던 화면은
'빌리'가 '마루트'를 따라가다 해변에 이르러
나체로 걸어들어가는 모습을 뒷모습으로만 담습니다.
(이 장면은 저에게 감동적으로 비쳐지기까지 합니다.
브루노 뒤몽의 미학적 예의가 전 여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넘어지고 뒹굼으로써 극의 리듬과 인간을 보여줬던 모습은
사건의 실마리가 전혀 이상하게 풀림으로써 해결이 됩니다.
알프레드는 분명 '남자'이고 '카니발'일거라고 했던 대사는
'마루트'가 옆에 있음으로써 완전히 어긋난 발언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마지막에 사건이 완전히 해결 됐음에도 불구하고
부풀어 올라 결국에는 뜨게되는 알프레드의 모습을 통해
이 소동극 자체가 얼마나 모순되고 이상한 세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게 됩니다.
(심지어 총으로 쏴서 알프레드를 구조 합니다.)
이러한 브루노 뒤몽의 형식적인 시도와 설정들은
그 자체로 정교하고 섬세하게 이어붙여 설렁설렁 만든
블랙 코미디가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이상한 어긋남과 부조리와 허탕은
이상한 화합을 이룸과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결국, 알프레드의 극중 대사처럼 허탕을 치는, 허탕 밖에 없는
인간세계를 어쩌면 굉장히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6-1
알프레드가 부풀어 올라 뜨기 전에
이사벨이 떠오르는 장면이 먼저 있습니다.
아마도, 형식적으로 매우 중요한 분기점으로 보이는데
이는 성모 마리아를 위한 행렬 뒤에 이루어 졌다는점,
그 행렬 뒤에 마루트와 빌리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점을 오드가 알게 되었다는 점,
마루트가 빌리의 정체를 알게 된 후라는 점,
그리고 자신의 동생이자 남편의 사촌 동생이 사라진 뒤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갑자기 말도 안되는 판타지 장면을 집어넣음으로써
이 소동극의 부조리와 극의 리듬을 완전히 바꾸는 장면이 됩니다.
7.
'빌리'는 줄리엣 비노쉬가 연기한
'오드'의 딸이자 아들이고,
빌리의 아버지는 자신의 외삼촌 혹은
외할아버지가 되는 셈입니다.
이 말도 안되는 족보는
마루트와 사랑을 하게 됨으로써
더더욱 처절하고 가슴아프게 다가옵니다.
끝내 마루트가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죽이지 못한 것으로 저에겐 보입니다.
죽이지 못한 이유는 '빌리'를 사랑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빌리'가 자웅동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육으로 쓰기 위해 옷을 벗기는 과정에서 확인했을거라 생각합니다.)
'빌리' 혼자 '마루트'를 사랑하게 된 마지막 엔딩은
씁쓸하고도 긴 여운을 선사하게 되지요.
8.
전 이 영화가 해피 엔딩이냐 새드 엔딩이냐라고 물었을때,
오히려 새드 엔딩쪽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미스터리 실종 소동극을 통해
마을 사람들이 화합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화합이 저는 무조건적으로 좋아보이진 않습니다.
이상한 화합은 자신들의 손을 통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의도치 않은 선로를 통해 해결이 되었기 떄문이겠지요.
그리고 그 카니발리즘 어부 가족들이
배려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동정심으로
풀어주었기 때문이지요.
끝까지 성모 마리아와 경찰들 덕에
이 사건을 해결한 것으로 오인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이 세계의 부조리와도 자연스레 연결이 됩니다.
이 웃지 못할 아이러니를 아는 사람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빌리'이기에 더 처연하게 다가옵니다.
아마도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일 것으로 추측되는 크리스찬과
(식탁에서 실종사건 얘기를 할때 이리저리 다니며
카메라를 향해 응시하는 쇼트가 플래시 백으로 나옵니다.)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오드는 사건 후유증으로 기억하지 못하거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돌아옵니다.
(크리스찬은 사건 전에도 조카들에게 놀림 받을 정도로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더욱 결정적인 이유는
'빌리'의 사랑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일 테지요.
9.
브루노 뒤몽의 작품에 나오는 배우들 연기가
테크닉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매우 훌륭한 연기라 생각합니다.
특히나, 파브리스 루치니와 줄리엣 비노쉬는
굉장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네요.
줄리엣 비노쉬를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감독은
브루노 뒤몽이 아니면 만들지 못할 듯 보입니다.
(줄리엣 비노쉬가 숲에서 잡히는 장면이나,
잡히고 나서 마루트 엄마에게 맞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긴 합니다.)
그리고 파브리스 루치니의 꼽추연기는
상체를 흔들흔들 거리며 걷는 테크닉이나
말의 리듬을 자유자재로 쥐고 흔드는 대사처리 등
놀랍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합니다.
10.
'슬랙 베이'는 기상천외한 블랙 코미디가
(영화)세계를 감싸는 하나의 정조라고 봅니다.
이토록 참혹하고 아스트랄한 코미디는
근 몇 년간 보지 못한 것 같아요.
전부 불균형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그 불균형의 조화가 형식으로나 내용으로나
심지어 캐릭터로나 역설적으로 무척 아름답습니다.
(어떻게 보면 꼽추 형상자체가
슬랙 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를 테지요.)
그리고, 브루노 뒤몽이 왜 프랑스가 사랑하고
주목하는 감독인지도 잘 알게 되었구요.
'잔다르크의 어린시절'이 무척이나 궁금하기도 한데,
후에 이 영화도 개봉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듭니다.
10-1
부제 이야기를 또 해야 할 것 같은데
'슬랙 베이'라는 영제목 처럼 영화와 어울리게 바꾸면 모르겠지만,
원제를 바꾼 것도 아니고
부제를 관성적으로 집어넣는 행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전 이 영화의 부제가
필요한 행위인지 부터가 의구심이 듭니다.
(부제를 넣는다고 관객이 더 드는 것도 아닐텐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