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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우 Oct 03. 2021

가을이 오면

아침저녁으로 날이 차다.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들이 당장에 붉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다. 얼마 전만 해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벌써 은행나무 열매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 행여나 그것들을 밟을까 보도블록 위를 살금살금 걸었다. 이번 가을에도 나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든 것은 내 위에서 조금씩, 하지만 갑작스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막상 여름이 흘러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찬 바람 뒤로 미련을 흘려보낸다. 시간의 마디를 나누는 것이 크게 의미 없는 일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 100일도 채 남지 않은 2021년의 달력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진다. 올해는 무서울 정도로 아무 일이 없었다.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를 지우는 일, 마음을 두지 않는 일이 습관처럼 된 것 같다.


H는 내가 회피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말했다. 스스로 겁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맞닥뜨리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런 말을 꺼낸 H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내가 말을 할 때 사람의 눈을 잘 쳐다보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이 떠올라서다. H의 눈은 식탁 위 노란색 조명을 모두 흡수해버릴 만큼 까맸고, 나는 그런 그녀의 눈을 보며 아무 대답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사람의 눈을 보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머릿속이 백지가 된다.


H와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와 오전에 필기시험을 치렀던 회사에서 준 파란 봉투를 열었다. 소정의 교통비와 함께 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 '오늘의 이 치열했던 시간이 빛나는 미래로 이어지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말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뜨끔했다. 치열하다는 말을 쓸 정도로 이 시험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나는 단 한 번도 치열하게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해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이런 카드와 함께 동봉된 돈을 받아도 될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지갑에 쑤셔 넣고 보니 참 웃겨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치열하지 않았는데도 치열함의 보상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H의 말이 맞았다. 나는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지 외면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이었다. 진심일수록 아픈 법이고, 기대를 했기 때문에 실망하는 법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책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읽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치열함을 택하기보단 지금 하고 있는 것을 놓지 않기로 했다. 요즘 출근하기 전 아침에 1시간을 헬스장에서 보내고 있는 이유다. 일이 끝나고 나면 더 하기 싫어질 것 같아서, 어차피 홈트는 죽어도 안 하니까. 덕분에 저녁만 되면 다른 사람들의 표정에 반응할 힘도 없다. 종이인형처럼 나풀거린다. 나풀나풀. 올해 가을 낙엽도 이런 식으로 쌓이려나.


길 가에 은행이 잔뜩 떨어져 있었지만 나무는 아직 파랗다. 언제 그것들이 갑자기 바뀌어버릴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서서히, 지금도 변해가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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