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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우 Nov 14. 2021

비꽃

시 모음집 #6

낡은 찻장에 

정든 그릇 소리가 스몄다

이곳은

아마도

너를 기다리는 자리

가방에 든 

매번 똑같은 책을 

펼쳤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창가에 놓인 장난감들은

들쭉날쭉 나를 바라보는데

그 창밖 너머로 

혹시나 네가 올까

행여나 

조금 더 빨리 올까 

살피다가

부끄러워져서 

잘 읽지도 않는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결국 책상 위에 엎드러진

나의 등을 톡톡 두드리는 

네 모습은

머리가 조금 더 길었고

가을 같은 미소를 지녔고

오랜만의 만남에도

굳이 안부를 묻지 않았고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를 했다

옛날의 나는 너에게

술에 취해 전화를 했고

이런저런 세상에 대해

아무렇게나 불평을 했고

네가 있는 그 세상이

정말 싫다고 했고

그런 나를 너는

싫지 않은 듯 받아줬고

나는 그런 너를

아무 말도 없이 떠났다

이젠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

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너의 뒷모습을 볼 때

나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지

않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너의 말대로 나는

여전히 겁이 많은 인간

이었다

너와 헤어지는 지하철 역

그땐 아마도

하늘에서 비꽃이 내렸다

이젠 언제부터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도 할 수 없는

그런 검은색 가방을 꼭 쥔

나의 하얀 손등 위로

성긴 비꽃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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