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이 달 안에 어디로든 떠나갔다 돌아와야겠다고 3월의 첫날 마음을 먹었다. 결심은 했지만 치밀하게 계획하고 싶진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다 기차표를 산 건 3월이 절반쯤 갔을 때였다. 올해 봄꽃이 예년보다 이르게 핀다는 기사를 보았다. 계절이 오기 전에 내가 직접 찾아가 보는 것도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 거다.
경주가 좋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여행했던 때는 기억나지 않는데,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건 기억나는 묘한 도시. 리조트 강당 천장이 무너졌대서 회식을 하다가 오밤중에 경주로 달려왔던 2014년 2월 17일, 봄옷을 입고 덜덜 떨면서 사고 현장 여기저기를 다니는데 눈까지 내렸다. 서울로 돌아와서 감기를 한참 앓았다. 좋은 기억이 아니었으니 이번 여행으로 예쁘게 덧칠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눈에 보이는 경주는 사방이 영락없는 봄이었다. 파란 하늘, 소복이 쌓인 눈처럼 탱글탱글 피어난 벚꽃들, 바람에 팔락이는 꽃무늬 원피스 끝자락과 그 위로 흩날리는 꽃비. 특히 동궁과 월지(안압지)의 야경이 황홀했다. 봄과 밤, 꽃과 빛과 물, 그리고 오래된 건물들, 제각기 아름다운 것들이 거기서 한데 어울려 흐드러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모든 하나하나가 한껏 절정에 이르러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가슴이 벅찼다.
봄이 시각적으로 만개했으나 칼바람은 매서웠다. 철 모르고 예년보다 일찍 핀 꽃들이 가지에 매달린 게 장하게 느껴질 만큼, 편의점의 스타킹이 죄 동날 만큼, 이빨이 달달 떨리고, 눈이 시려 눈물이 날 만큼. 남도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들이닥친 꽃샘추위의 기세는 등등했다. 그나마 일기예보가 틀려 낮동안 비가 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추워서 월정교 야경을 포기했고, 자전거 타기를 포기했고, 더 많은 맥주를 포기했으며, 추워서 시킨 동동주가 차가워서 남겼다.
피어날 때를 맞추지 못하고, 시절을 영리하게 따라잡지 못하는 것조차 섭리의 일부인가 싶었다. 꽃도 그렇고 추위도 그렇고, 봄도 겨울도 그런데 나 따위가 뭐라고 매사 깔끔하게 뭐든 제때 제대로 해내기를 바라겠는가. 스스로에게 조금 더 관대해져도 괜찮다고 나 자신을 토닥이며 지붕이 예쁜 가게가 즐비한 골목 곳곳을 쏘다녔다.
그러니까 황리단길에 있는 독립서점에서 좋아하는 시인들의 신간을 잔뜩 산 것은 관대함의 실천이었다. 두 권은 선물용이어서 마음이 부유해진 기분마저 들었다. 첫 발행일이 특별한 두 권은 나를 위해 샀다. 한 권은 올해의 첫날, 한 권은 내겐 애틋한 작년 어느 날 초판 1쇄를 찍었다고 적혀있었다. 시집을 잔뜩 골라 계산대에 올리자 사장님이 "시를 좋아하시나 봐요"하고 물었다. "엄청 좋아해요"라고 답했다. 사장님과 취향이 통한 덕분에 한정판 엽서를 선물로 받았다.
혼자 하는 해외여행은 외롭지 않은데, 국내 여행은 외롭다. 그래서 경주 여행의 절반을 함께해준 친구 S가 고맙다. 혼자 꿋꿋한 봄나들이를 가겠다고 표를 끊고서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급히 S를 꼬셨는데 그가 여행을 완성해준 느낌이다. S와 함께여서 가능한 순간들이 많았다. 하나는 침대 위에 누워하던 시낭송이다. 서로에게 선물한 시집에서 제목이 마음에 드는 시를 읽었다. 라디오를 진행하듯 시를 읽는 나를 S는 놀려댔다. 나는 온수매트 위의 그 시간이 좋아서 목이 메었다.
S에게 내가 던진 엉뚱한 질문들과 거기 순순히 내놓은 S의 답변들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천마총에서 나오는 길에 S가 희망하는 매장 방식을 물었다. 계림을 걸으면서는 한반도 역사의 어느 한순간에 신분과 환경의 제약 없이 태어난다면 언제를 고를 건지 물었다. 황남빵을 먹으면서는 빵으로 태어난다면 무슨 빵으로 태어나겠는지 물었다. 매번 일곱살 소녀에게 듣는 듯 재밌는 대답이 돌아왔다. S가 더 좋아졌다.
S는 내가 춥다는 말만 300번쯤 했다고 주장하더니 늦여름 초가을 경주의 더위에 시달려 볼 것을 조언했다. 파릇파릇한 왕릉을 감상하는 것도 색다를 거라는 첨언이 있었다. 내 혀가 유독 빨갛다면서 혀빨간사춘기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낄낄거리는 S의 유머 감각에는 혀를 찼지만 나는 그 별명이 싫지 않았다. 원래 빨간데 매운 걸 먹으면 더욱 불타오르는 내 혀뿐만 아니라, 서른 넘어 또 봄을 생각하며 질풍노도를 지나는 내 마음까지 S가 알아채 준 것 같아서 그랬다.
모처럼 알찬 주말이었고, 그래서 더욱 어안이 벙벙한 월요일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