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이별과 작별은 서로 엄연히 다른 말이다. 이별이 서로 갈리어 헤어지는 일이라면, 작별은 이별을 짓는 일이다. 작별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것이고 그 인사 자체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이별과 작별을 일일이 헤아린다면 이별의 수가 작별의 수보다 더 많을 것이다. 제대로 된 인사 없이 헤어지게 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성숙한 이별이 쉽지 않고 그런 이유로 더더욱 성숙한 작별은 어렵다.
잘 만든 이별 노래는 선뜻 기억나지 않는데 잘 만든 작별 노래를 꼽아보라면 떠오르는 곡들이 있다. 그중 딱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그룹사운드 잔나비의 정규 1집 <MONKEY HOTEL> 타이틀곡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을 택하겠다.
그땐 난 어떤 마음이었길래
내 모든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
그대는 또 어떤 마음이었길래
그 모든걸 갖고도 돌아서 버렸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 품 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
다짐은 세워올린 모래성은
심술이 또 터지면 무너지겠지만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 품 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
그리운 그 마음 그대로
영원히 담아둘거야
언젠가 불어오는 바람에
남몰래 날려보겠소
눈이 부시던 그 순간들도
가슴아픈 그대의 거짓말도
새하얗게 바래지고
비틀거리던 내 발걸음도
그늘아래 드리운 내 눈빛도
아름답게 피어나길
우리는 아름다웠기에
이토록 가슴 아픈 걸
이제야 보내주오
그대도 내 행복 빌어주시오
2016년 여름이 다 끝나갈 무렵 이 노래를 처음 들었다. 가사와 선율이 공들여 쓴 여느 시보다 더 처 절하게 아름다운 노래였다. 애절하기도 애절했지만 무엇보다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 이만큼 정돈된 말로 작별을 하기까지 누군가가 앓았을 시간이 오롯이 느껴져 가슴이 아렸다. 지나간 사랑에게 온 마음으로 건네는 그의 인사가 나의 마음으로 스며들어 한마디씩 수놓아지고 간신히 매듭지어지는 것 같았다. 도저히 듣기를 멈출 수가 없어 그날 밤이 다하도록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름이 두 번 바뀌고 또 다른 여름을 맞기 전에 마침내 잔나비가 정규 2집 앨범 <전설>을 냈다. 연중 숱한 연인들의 축제, 그중 한 날을 하루 앞두고서. 최고의 작별 노래가 경신되는 순간이었다. 어쩌자고 또 이다지도 뜨겁게 슬프고 먹먹하게 아름다운 걸 만들어냈는지 첫 소절부터 단어 하나 가락 하나를 지나치기 어려워 잠을 설쳤다. 타이틀곡 제목은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https://youtu.be/R7f_CRMTwyc?t=69 (1:09부터)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스윽 훑고 가셔요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 있지
머물다 가셔요 음
내게 긴 여운을 남겨줘요
사랑을 사랑을 해줘요
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새하얀 빛으로 그댈 비춰 줄게요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우리 둘만의 비밀을 새겨요
추억할 그 밤 위에 갈피를 꽂고 선
남몰래 펼쳐보아요
나의 자라나는 마음을
못 본채 꺾어 버릴 수는 없네
미련 남길바엔 그리워 아픈 게 나아
서둘러 안겨본 그 품은 따스할 테니
언젠가 또 그날이 온대도
우린 서둘러 뒤돌지 말아요
마주보던 그대로 뒷걸음치면서
서로의 안녕을 보아요
피고 지는 마음을 알아요
다시 돌아온 계절도
난 한 동안 새 활짝 피었다 질래
또 한번 영원히
그럼에도 내 사랑은
또 같은 꿈을 꾸고
그럼에도 꾸던 꿈을
난 또 미루진 않을거야
이건 뜨거운 여름밤이 가고 볼품없는 것만 쥔 채 남은 누군가가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낸 뒤에야 비로소 할 수 있는 작별이다. 이별의 완성이자 시작의 다짐이다. 모든 걸 주고 웃을 수 있었던 뜨거운 사람이 순순히 제 쉬운 마음을 고백하는 첫마디는 아무렇지 않은 양 의연하다. 그래서 더욱 처연하다. 그 마음을 스윽 훑는 것으로 긴 여운을 남겨달라고, 사랑을 해 달라고 애원하는 심정을 가늠해본다.
이 노래는 '언젠가 또 그날이 온대도'로 절정에 이른다. 서둘러 뒤돌지 말고 마주 보던 그대로 뒷걸음질 치면서 서로의 안녕의 보자는 말은 그것만으로도 너무 절절한 작별이어서 심장이 무너진다. 피고 지는 마음을 알고도 새 활짝, 그냥 활짝도 아니고 '새' 활짝 피어나겠다는 결의가, 어쩌면 예정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영원을 꿈꾸겠다는 의지가, 뜨겁고 예뻐서 와락 끌어안고 싶은 기분이다. 밤을 지새 들을 수밖에.
이 봄, 세상 모든 연인들이 주저하지 않기를 바란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선뜻 내비친 마음들이 견딜 수 있을 만큼 달아오르고 버틸 수 있을 만큼만 아프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잔나비가 노래를 많이 많이 많이 자주 자주 자주 만들어주기를!
잘 몰랐어요, 밴드 잔나비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12간지 띠를 말할 때 원숭이 대신 잔나비라고 말씀하셔서 원숭이라는 의미는 알고 있었지만.
테이프와 CD 대신 MP3 파일로 음악을 듣던 시절에도 음악 듣기 참 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무선인터넷과 스트리밍이라는 서비스로 그마저도 없이 어디서든 음악을 듣기 쉬워졌지요. 덕분에 운전하면서, 적당히 검증받은 인기순위가 높은 음악들을 그냥 플레이하다가, 덜컥 명곡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가족과 함께 외출할 때는 방탄소년단과 트와이스라는 아이돌 그룹의 신나는 댄스 음악 사이에 끼어 있는 잔잔한 음악은 제대로 듣기보다는 건너뛰는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래서 처음 들었을 때는 솔직히 그저그런 흔한 이별 발라드가 또 하나 나왔구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지나쳤어요.
혼자만 운전하는 퇴근 길에 또다시 편하게 실시간 인기순위에 따라 음악을 듣다가 다시 접한 노래가 애잔한 멜로디에 트럼펫 연주도 마음에 들어 자꾸 반복해서 듣게 되었네요. 그러다 정체길에서 찬찬히 가사를 읽어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뭔가 이해는 될 것 같고, 이해를 넘어 어떤 마음이 느껴질 것만 같은 가사에 나도 모르게 사이 어떤 격한 감정에 빠지게 된 것 같아요.
집에 와서 이 곡을 지은 가수와 다른 노래들과 이런 저런 정보들도 검색해 보지만, 그런 지식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냥 이 곡은 머리와 귀로 듣는게 아니라 마음으로 들으면 족한데. 그냥 가슴으로 느끼면 그만이니까.
검색하다가 비슷한 느낌으로 글을 쓰신 분을 발견해 반가운 마음을 적어 보고 싶어 언제적 로그인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사이트를 몇 년만에 겨우 접속해서 몇 자 남기고 갑니다. 부디 남의 귀한 공간에 누가 되지는 않았으면.
저는 '... 마주보던 그대로 뒷걸음치면서 ..' 부터 시작해서 '난 한 동안 새 활짝 피었다 질래' 부분이 가장 좋았어요. 가장 슬펐다고 해야 맞을까요. 이 부분은 들을 때마다 울컥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