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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th in Dec 31. 2020

2020, Reflection

시간의 밖에서 돌아보며 끄적끄적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두려웠고, 뜻대로 된대도 버거울 것이어서 아찔했다. 확신처럼 붙들었던 당위들을 살짝 놓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분명치 않았기에 그만큼 느슨해진 중심의 영점을 조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살아간다는 게, 늙어간다는 게 새삼 막막했다. 목표를 세우고 그걸 해내는 것으로 삶의 단계가 뚜렷하게 만져지던 시절이, 다가오지 않은 내일을 마냥 기대만 하던 나날이 그리웠나 보다.


숨 쉬듯 콘텐츠가 쏟아지는 세상, 봤던 걸 다시 보기보단 마음에 맞는 새 것 찾아 헤매기 바쁜 나였는데 이미 봤던 오래된 드라마들을 골라 파고들었던 건 그래서였다. 커피프린스 1호점, 아일랜드, 시크릿가든, 건빵 선생과 별사탕, 내 이름은 김삼순, 도깨비, 응답하라 시리즈까지. 2020년으로 넘어오는 겨울동안 지친 영혼을 낡은 환상 속에 처박아 흠뻑 적셨다. 온전히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더듬거리며 드라마 속 어른의 세계를 동경하던 소녀 시절의 나를 만나는 긴 겨울잠. 일과가 끝나야 시작되는 그 동면 속에서야 겨우 진짜 내가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같은 드라마 를 두고 그때와는 다른 감정에 젖는 내가 낯설었지만 싫지 않았다.


정월 내내 부대끼던 마음을 다잡으려 하니, 세상에 역병이 돌았다. 인간의 계획이 얼마나 나약한가. 예측은 무용했다. 후회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마음가짐을 돕는 것인가 하는 불온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준에 대한 정답을 구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라고, 오지 않은 것을 두고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별 수 없는 척 철없는 취미에 신나게 나를 던졌다. 공과 사, 일과 방탄소년단 둘로만 요약되는 일 년, 마냥 게으르게 탕진하는 단순한 나날이었다.


크리스마스와 정월 초하루 사이의 기이한 일주일은 시간의 밖에 있는 괄호 속 같다고, 미셸 투르니에가 썼다. 그 괄호 속에서 바깥 시간을 곱씹다가가 지난 일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토록 생산 없는 소모로만 보낸 해가 없었는데, 이만큼 뜨거웠던 해도 없었다. 잠이 줄어도 피로를 느끼지 못했다. 다른 것은 욕망하지 않았다. 방탄에 울고 웃고 위로를 받으며 편견과 외면이 얼마나 무지하고 무모한 태도인지 절감했다. 진정성은 언젠가 어디론간 반드시 도달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또래보다 철없음이 부끄럽다가도, 아직 다 크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고비마다 인생의 여러 모퉁이에서 만난 벗들에게 매달려 묵직한 마음을 쏟아내고 치유를 받았던 해이기도 했다. 그들은 내게서 쏟아지는 찌꺼기들을 툭툭 털어내거나 다독이며 제 곁을 내어주는 것으로 나를 지탱했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허물어질 수 있어서 따뜻했고 든든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이 토닥여 주었다. 비좁게 깊어지는 참된 관계들이 귀했다. 사람이 너무 싫고, 너무 좋다.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식사 대신 알약을 삼켜야 할 것 같은 연도를 끙끙 살아내는 동안 세상의 어떤 것들은 너무나 빠르게 변했다. 그럼에도 어떤 것들은 변치 않았다. 그게 마음을 흔들고 또 진정시켜 주었다. 나에 대해서도 그랬다. 관성적인 조바심은 내려놓았고, 하지 않았을 선택을 했다. 같은 것을 보고 달리 느꼈으며, 시큰둥했던 것에 푹 빠졌다. 바뀌지 않을 줄 알았는데 바뀔 수 있는 나여서 감사한 마음이 남는다. 다가오는 2021년에는 나의 무엇이 달라지고 또 달라지지 않을까. 다시 청춘을 기다리는 소녀라도 된 것처럼 나의 가을날을 기대한다.


다만 도피는 탈피가 아니기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때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지를 되짚어 본다. 세상에 무엇을 남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한다. 대단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흔적이 되고 싶다. 다정은 체력이므로 심신의 근육이 견고한 사람이 되고 싶다. 민들레를 꺾지 않고 무릎 꿇어 호호 불어주는 삶을 닮고 싶다. 늘 다짐보다 못난 채로 하루를 살아내기 바쁘지만, 계속 다짐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올해의 심정이 스미어있는 노랫말을 일부 떼어 남겨둔다. Reflection.


I know Every life's a movie

We got different stars and stories

We got different nights and mornings

Our scenarios ain't just boring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재밌어 매일매일 잘 찍고 싶어

난 날 쓰다듬어주고 싶어 날 쓰다듬어주고 싶어

근데 말야 가끔 나는 내가 너무너무 미워

사실 꽤나 자주 나는 내가 너무 미워

...

세상은 절망의 또 다른 이름

나의 키는 지구의 또 다른 지름

나는 나의 모든 기쁨이자 시름

매일 반복돼 날 향한 좋고 싫음

...

나는 자유롭고 싶다 자유에게서 자유롭고 싶다

지금은 행복한데 불행하니까

...

I wish I could love myself


날씨가 2층 같았던 칠월의 한남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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