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얼굴이 고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인위적으로 만든 시간의 분절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년 이 때나 되어서야 뭔가를 진득하게 끄적거리게 된다. 의식의 흐름에 맡겨보는 올해의 단상.
너무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폭풍 같은 한 해였다. 권태를 느낄 겨를이 없을 만큼 뭔가가 자꾸 바깥에서 몰아쳐왔다. 두 팔 벌려 껴안을 수 있는 것 말고, 눈을 질끈 감고 온 몸을 잔뜩 부풀려 받아쳐야 하는 것들이었다.
한때 세상 모든 경이로운 것들이 홍수처럼 내게 밀려들어오던 시기가 있었다. 감각의 축제가 열린 것만 같던, 한껏 젖어들어 전부 내 것으로 흡수할 수 있었던 뜨거운 날들. 해가 저무는 버스 창가 커튼에 드리워진 빛의 무늬에서도 영감을 받을 수 있었던 시간들. 그 때는 아주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꽤 오래전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내가 재능을 죽이고 있는 건지, 내게 있던 재능이란 건 애매하기 짝이 없어 짐일 뿐이었는지. 그 미약한 재능이 사그라들어 끝내 사라져 버린 건지. 애초엔 내게 재능 따윈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게 되었다.
탈피를 위해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주 그런 생각만이 밤을 적셨다. 그 밤이 끝나면 생활의 전장으로 나아가는 게 아찔하고 서글펐지만, 나날이 치열해지는 전투가 오히려 시간을 견디게 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쟁취하는 삶 말고 그저 취하는 삶을 산다면 좋을텐데. 싸우자는 게 아닌데 싸워야만 할 때가 너무 많았다. 쟁취함으로써 얻는 긴박한 보람보다 취해 누리는 느슨한 기쁨이 좋은데 말이다.
전장은 여느 때보다 유독 깜깜하고 어수선했다. 진심이 통하는 싸움이 아니었다. 그러니 반작용처럼 취할 만하면서도 해롭지 않은 그 어떤 것을 찾아 유독 어슬렁거릴 수밖에.
실컷 취하며 사는데 마음까지 쓰게 되면 속수무책이다. 잘 취하고 잘 쏟는 내 마음은 너무 취약하다. 품은 애정만큼 고스란히 약점이 생긴다.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가치나 관념이든, 일이든, 그 무엇이든 많이 사랑할수록 온통 무르게 되어 스치는 바람에도 쉽게 상처받는다.
어느 여름밤에 친구랑 그런 얘기를 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우뚝 선 것도 아닌 내가 바닥 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실감하는 일이라고.
취하기만 하고 깊이 마음을 쓰는 것을 주저하게 된 게 그래서일까. 아니면 마음이 닳아빠져서 취할 줄만 알고 쏟아붓는 것은 못하게 된 건가, 가끔 멍해지기도 했다.
어딘가에 취할수록, 또 마음을 온전히 주진 못할수록 자기 자신이 궁금해진다. 내 영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영혼에도 얼굴이 있을까. 눈코 입이 달려있어서 표정이란 걸 지을 수 있을까.
내 영혼은 껍데기보다 아름다울까. 아니면 몸에 갇힌 걸 안도할 만큼 닳아빠져 보기 좋지 못할까. 사람들이 서로의 영혼을 감각할 수 있다면 삶은 더 충만해질까, 아니면 비참해질까.
새 것이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는 게 위안이 된다. 곱게 낡은 것의 아름다움을 새 것은 이길 수 없다. 이상하고 멋진, 좋은 할머니로 늙어가는 길에서 걸음마를 뗀 나는 최후의 영혼을 조용히 빚고 있다.
시류에 잠식되지 않고 귀한 것을 그러모아 영혼의 얼굴을 완성해가는 과정은 올해의 앨범으로 꼽은 이 앨범의 이야기, 마지막 노래와 결이 제법 맞는다. 제목으로 삼고 가사를 끝으로 남긴다.
끝날에 머금은 영혼이 제법 완전에 가깝기를, 영원에 부족함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볼 수 없는 2021년에 행복을 남겨두고, 안녕!
안녕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오늘 날씨만큼 흐렸나요
화창하진 않았대도 자그만 행복이 깃들었길 바래요
나의 하루는 여느 밤과 같았어요
모든 게 미워지더니 그게 결국 다 후회가 되고
전부 다 내 탓이 돼버렸어요
삶이란 건 알다가도 모르겠죠
내가 많이 사랑했던 게
나의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되더니 나를 매달고 싶대요
알아요 나도 수없이 해봤어요 노력이라는 걸 말예요
근데 가난한 나의 마음과 영혼이
이제 그만해도 된대요
안녕 마지막 인사가 되겠네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제 다신 볼 수 없기에
자그만 행복을 남겨두고 가요
- 너드커넥션,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 (New Century Masterpiece Cine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