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일 Nov 11. 2024

<방랑자>를 듣다가

   문탠로드는 삼포해안길 일부이고, 삼포해안길은 부산 갈맷길 일부이다. 임랑해수욕장에서 오륙도 유람선 선착장에 이르는 부산의 동북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갈맷길 코스 안에 삼포해안길이 있는데 미포, 청사포, 구덕포 이렇게 세 포구를 잇는 길이라고 해서 ‘삼포三浦’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 중 미포를 나와 달맞이언덕으로 가는 입구에서 청사포까지 1시간 정도 걸리는 산책길을 문탠로드라고 이름 붙였다.

   청사포는 미포와 구덕포 사이, 즉 해운대해수욕장과 송정해수욕장 사이에 있는 작은 포구다. 고기잡이 나갔다가 난파 당한 남편을 기다리는 부인을 애처롭게 여긴 용왕이 푸른 구렁이靑蛇를 보내 용궁에서 남편과 상봉시켰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1920년경 모래 ‘사(砂)’자로 바꾸어 청사포靑砂浦로 개칭되었단다. 20년 넘도록 근처에 살면서 단 한 번도 푸른 모래를 본 적이 없어서 개연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어 보이는 '모래'로 왜 바꿨는지 늘 궁금했지만 푸르다는 이미지를 노래에 활용한 최백호는 그 까닭을 아는지 혹시 다음에 만날 일이 생기면 꼭 물어보고 싶다. 


해운대 지나서

꽃 피는 동백섬 해운대를 지나서

달맞이 고개에서 바다로 무너지는 청사포

언제부터인가 푸른 모래는 없고

발 아래 포구에는 파도만 부딪혀

퍼렇게 퍼렇게 멍이 드는데

(최백호, <청사포> 가사 일부)


   최백호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그린 그림(나무를 주로 그리는 전문 화가라고 한다)을 전시한 청사포 한 화랑엘 우연히 들른 적은 있다. 한참 오래 전이고 그림 볼 줄 모르는 문외한인지라 어떻게 그려먹은 그림인지는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던 노가객의 열정만은 인상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재즈에 음악적 기반을 둔 에코브릿지는 본인이 직접 노래까지 마친 <부산에 가면>을 음반에 수록하는 대신 최백호를 찾아가 가창을 부탁했다. 최백호 목소리로 불러야 곡이 완성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최백호는 고향인 부산 이야기로 된 가사를 받자마자 "내 이야기인데"라며 흔쾌히 응했고 고급스러운 감성이 돋보이는 로컬송이 완성되기에 이른다. 노가객의 연륜이 빚어낸 절창이 부산이라는 공간의 낭만성과 어우러져 한층 탁월해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곡 만드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노래 주인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파악한 에코브릿지야말로 참으로 대단한 아티스트다. 

   이왕 이리 된 거 <부산에 가면>에 얽힌 에피소드도 늘어놓겠다. 영화배우 라미란이 한 TV프로에 나와 <부산에 가면>을 부르는 유투브 클립이 곤히 자던 어느 날 밤 톡으로 날아왔었다. 서울 사는 친구가 한 잔 걸치다 보낸 게다. 취기만 오르면 센치해지는 이상 체질을 가진 녀석은 걸핏하면 안부랍시고 문자를 보내곤 했다. 보내는 것까진 좋은데 그 문자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청승궂기 짝이 없었다. 헌데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종목을 바꿔 동영상을 보낸 것이다. '이왕 들을 거면 원곡을 들어야지'란 댓글을 달고선 최백호가 부른 <부산에 가면> 뮤직비디오를 선심 쓰듯 보냈다. 녀석이 들이당짝 <부산에 가면>을 들이민 의도는 뻔했다. 부산 내려가면 진하게 회포 풀자고 바람은 지가 먼저 잡아놓고선 내려온단 소식은 몇 해째 감감이었으니까. 설레발부터 치긴 했지만 수습이 아니 되니 그렇게라도 무안한 마음 전하려는 꼼수였던 게 틀림없다. 아닌 게 아니라 취해서인지 추워서인지 곱은 손가락으로 녀석은 맞춤법이 엉망인 변명을 늘어놓았다.

   

   - 간다긴다 바람만 잔쯕 넣고 미앤하단 얘기하는게 더 서운할거 같다

   

   여기서 안 끊으면 술주정 문자폭탄이 이어질 게 뻔해서 쐐기를 후딱 박았다. 


   - 부담 갖지 마라. 내려올 때 되면 다 내려온다. 대신 내려오면 푸지게 놀자. 머피 가서(아직 있나 몰라) 생맥 한 잔 땡기면서 시가 빨고, 너 자주 가던 해운대 횟집(언덕배기에 있는 가게 이름 까먹었다) 가서 회 한 접시 먹자. 먹고 마시면서 이런저런 사는 얘기 나누면서 속절없이 늙어가는 우리 인생 잠깐이나마 지체시키자. 그래야 네 놈도 숨통이 트이지. 원래 서울 놈 아니고선 정기적으로 바깥바람 쐬어 줘야 하느니. 내가 거기 살아봐서 잘 알잖니.

   가끔 재수없다고 느끼긴 해도 친구라고 칭하는 녀석들 중에서 너만큼 자랑스러운 놈도 없다! 굉장하다 박 아무개! 올해도 대단히 고생 많았다. 나이 들어 자주 볼라믄 너나 나나 건강해야 하니 몸관리 잘하시라. 어머니 안부 전해 주고 와이프, 아들 건강 기원한다. 가내 행복하시라. 볼일 다 봤으니 나는 잘란다.


   한밤 문자질 이후 3년이 더 지난 올 봄에서야 녀석과 재회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cnD6Q3DAu0


   젊은 거장 박주원은 한국 집시 기타 연주로는 정상이다. 그의 연주는 듣는 이를 대번에 무장해제시켜 버린 뒤 집시 음악 특유의 애절함이란 비수로 심금을 사정없이 후벼 파는 마성을 지녔다. 그런 그가 오로지 한 사람만을 염두에 두고 직접 멜로디와 가사를 만든 노래가 있다. 최백호가 부른 <방랑자>가 바로 그 곡이다. 박주원이 밝힌 비하인드 스토리다.


   사실 <방랑자>는 처음에 노래 대신 바이올린이 들어갔었는데, 선생님 목소리가 그 무엇보다 재즈나 보사노바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아 간절히 부탁했었다.(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심연 깊숙이 숨겨둔 대중의 일탈 본능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집시 음악>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6mPIKrNQojo


   이재익이라는 음악 프로듀서가 최백호 스타일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의 노래는 깊고 현명하게 흐르는 강과도 같다. 마른 대지를 넉넉히 적셔주는 강. 느리게 흘러야 할 때와 콸콸 넘쳐 흘러야 할 때, 가만히 고여 있어야 할 때를 아는 강(한겨레, 2020.04.17.) 


   <방랑자>를 듣던 깎새도 음악평론가나 된 양 한 마디 거든다. 


   쓸쓸하고 슬프고 처량한데 이상하게 듣고 나면 체증이 가라앉듯 후련해지는 노래. 길지 않은 인생 그만 허비하고 이 계절을 제발 음미하길 바라는, 사는 동안 참 많은 걸 겪은 할아버지가 다독이는 듯한 노래


   깎새더러 노래방에서 딱 두 곡만 불러주면 술값 굳는 건 물론이거니와 집 돌아갈 택시비까지 내어 줄 용의가 있다고 제안을 한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마이크 붙들고 단숨에 불러제낄 십팔번은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와 스티비 원더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두 곡 되시겠다. <방랑자>를 듣다가 여기까지 이르렀다.

작가의 이전글 시 읽는 일요일(17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