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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Nov 22. 2024

보험설계사

   자기가 정한 스케줄에 맞춰 불쑥 점방 문을 열고 들어와 팜플렛만 슬그머니 두고 가는 여자 보험설계사가 있다. A4 용지 한 장짜리 팜플렛 상단엔 스테이플러로 고정한 사은품 약간(엊그제는 사탕 서너 개가 들어간 봉지, 다른 날엔 건빵 1봉지, 대일밴드 2개 따위 대중이 없다)을 잊지 않는다. 세어보지 않아 그 주기를 파악하지는 못하였지만 보험설계사 입장에선 가망고객에게 꾸준한 세일즈 우먼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한 영업 패턴으로 일정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몇 달 전부터 정기적으로 깎새 점방을 찾는 그녀는 수줍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 번 읽어나 보세요"나 "변경된 게 있는데 알면 유익하실 겁니다"라는 짤막한 안내 멘트만 남기고 쿨하게 나가 버린다. 

   처음엔 무심했던 깎새가 어느 순간 그녀한테 감정이입이 되려 한다. 보험설계사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고액 연봉이니 MDRT라는 명예) 이면에 수면 아래로 침몰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발길질을 해야 하는 고단한 직업의 전형임을 잘 아는 깎새로서는 맨땅에 헤딩을 택한 그녀의 무모함이 안쓰러우면서도 그런 식으로라도 역량을 키우겠다고 나선 결단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어쩌면 '저리 애를 쓰는데 한 건 들어줘야겠어'하는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고도로 계산된 영업 기술일지 모른다. 실상 뚜벅이 영업이 노리는 궁극적인 목적이 그것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수를 놓듯 착실함만으로 승부해 팍팍한 인심을 뚫고서 영역을 확장해 나가려고 애쓰는 보기 드물게 순수한 보험설계사를 발견했다는 건 참 반갑다. 그렇게 이력을 쌓아나가다 보면 틀림없이 내성 강한 영업인으로 우뚝설 거이다. 

   부산에서 꽤 큰 규모를 자랑하던 보험판매법인에서 말 많고 탈 많았던 깎새 보험설계사 경력에 종지부를 찍은 게 벌써 10여년 전 일이다. 여러 보험회사 상품을 입맛대로 골라 팔 수 있는, 더 솔직해지자면 더 후한 수당을 받을 수 있는 보험회사 상품을 집중적으로 팔 수 있는 그 보험판매법인에는 보험영업이라면 닳고 닳은 보험설계사들로 수두룩했다. 영업엔 젬병이면서 썩은 동아줄인 줄도 모르고 십수 년째 보험 바닥을 배회하다 뒤웅박 신세로 전락한 깎새가 그 날고 긴다는 고수들 틈바구니에 끼어 보험 인생에 마지막 불꽃을 피우려고 했던 건 순전히 회사를 옮기는 조건으로 지급해 주는 알량한 보상금에 눈이 멀어서였다. 직전 회사에서 받은 연봉을 기준으로 보상금을 책정하는데 그 법인 기준으로 최하 등급이나 다름없었던 5백만 원이란 일시금을 받고도 감지덕지하던 당시 깎새는 누가 봐도 군색하고 처량한 신세였다. 허나 세상에 공짜란 건 없어서 명목으로야 보상금이지만 직전 회사 버금가는 실적을 낸다는 전제 하에 미리 당겨준 조건부 성과급 성격이 짙었다. 그러니 법인이 제시한 기준 아래로 성과가 부진하자 영업에 흥미를 잃어 계약서로 정한 계약기간 전에 회사를 관둔다면 모자라는 실적에 남은 계약기간까지 합해 환산한 반환금을 게워 내야 하는 채권 채무 관계로 변질된다. 받을 때야 공돈인 양 달콤했지만 어깨에 조건 충족이라는 돌덩어리를 인 일상은 강박적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겠다. 

   고성과를 이룩할 영업력을 키워 주려고 보험회사든 판매법인이든 보험영업에 최적화된 영업 스킬을 개발해 금과옥조인 양 보험설계사를 세뇌시키기 바쁘다. 가족의 생명과 안전, 안락한 노후생활을 들먹이며 가증스러운 입발림으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해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보험회사가 미는 주력상품을 후림대수작으로 얼마나 많이 팔아재끼느냐가 보험설계사 능력을 가늠하는 유일한 잣대다. 말주변은 시원찮고 배짱은커녕 뻔뻔함하고도 거리가 먼 깎새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십수 년 간 보험회사 언저리를 헤매고 다녔는지 돌이켜보면 깎새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가지만, 아무튼 버는 거 없이 보험회사 여기저기를 떠도는 장돌뱅이 신세를 청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뒤로 실적 최저 마지노선에 겨우 턱걸이하고 계약기간까지 근근이 채운 뒤 미련없이 그 보험판매법인을 떠났고 보험 바닥까지 영영 떠났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2022년 깎새가 커트점을 개업하고 대여섯 달 지난 어느날이었다. 느지막한 오후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전화기 너머로 늙수그레한 여자의 새된 목소리가 깎새 이름을 친근하게 찾았다. 그러자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가 누구인지. 그녀는 보험설계사였다. 더 구체적으로는 10년 전 깎새 보험 역정에 마침표를 찍은 보험판매법인에서 한솥밥을 먹던 동료 보험설계사였다. 그녀는 거기서 이미 오래전 터를 잡은 고참 중의 고참이었고 무엇보다 그녀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까닭은 그 보험판매법인 오너가 그녀의 조카여서 당시 같이 근무하던 사람들로부터 부러움과 시기를 동시에 받아서였다. 오너 프리미엄이 그녀 영업 성과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는 물어보질 않아 알 길이 없으나 그녀는 너무도 꾸준하게 고성과를 거두는 제법 잘 나가는 그 바닥 '실장님'이었다.

   하지만 곁에서 목도한 그녀의 영업 방식은 무모한데다 막무가내인지라 썩 내키지가 않았다. 원래부터 아는 사이건 오늘 처음 본 사이건 개의치 않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는 격으로 영업을 매조지하려 드는 저돌적인 스타일은 오랜 업력에서 기인한 자신감의 발로로 비춰져 일견 긍정적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관계를 오로지 판매 성과라는 이익의 관점에서만 헤아려 들고 그 기준에 들지 않는 사람은 매정하게 솎아내는 감탄고토식 접근은 깎새 가치관으로는 영 마뜩지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한 공간에서 어깨 맞대고 지냈음에도 깎새가 그만둘 때까지 데면데면했던 게다.

   한 사무실에서 여전히 같이 근무하는 동료를 대하듯 그녀는 거림낌없이 연락을 해왔다. 깎새가 그 회사를 나온 지 무려 10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말이다. 그녀는 깎새가 커트점을 개업한 사실을 들어 축하할 겸 방문하겠다는 뜻을 내비췄다. 뜻을 내비췄다고는 하나 통화가 이뤄지는 순간 이미 방문은 기정사실화된 것이나 다름없이 일방적이었다. 깎새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점방을 찾으려는 긴한 이유를. 추측컨대 우연히 깎새 근황을 주워 들었을 테고 곧장 영업력이 발동했을 게다. '버젓한 점방을 차릴 정도면 밑천이 없지는 않다. 개업한 지 6~7개월 지났으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테니 이쯤에서 적금 상품 하나 권하면 타이밍 딱이겠다' 안 봐도 비디오다. 그 10년 동안 만난 적 없고 그 흔한 전화 연락 한 번 주고받은 적 없었음에도 천연덕스럽게 깎새 점방을 찾겠다고 들이대는 건 오로지 그 이유 때문임을 십수 년을 보험 영업판을 뻑뻑 긴 경험 덕에 직감했다. 이럴 때 쓰는 속담이 있지. 썩어도 준치. 

   그녀가 아쉬웠다. 수작을 뻔히 꿰고 있는 이한테 접근하는 방법이 그것뿐이었을까. 그렇게 뻔뻔하게 구는 것만이 능사였을까. 밑바닥에서 새로 시작하느라 고생이 많다는 빈말이나따나 먼저 위로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보험설계사도 보험 파는 장사치이고 보면 장사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아니 텅 빈 점방에서 속끓고 있을 당신 속을 내가 왜 모르겠느냐며 정말 빈말이나따나 먼저 공감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가 설령 가식적일지언정 동병상련하는 정성을 내비쳤다면 그녀의 방문을 기꺼이 수용했을 깎새였다. 그녀는 통화 말미에 점방 주소를 문자로 찍어 달라고 했고 종료 버튼을 누른 뒤 한참 고민 끝에 깎새는 다음과 같은 문자를 남겼다. 


   잊지 않고 연락 주시니 고맙기는 합니다. 다만 오시겠다는 말씀은 재고하셨음 합니다. 보험 현장을 여전히 누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로 인해 세일즈에 여념이 없으신 분의 금쪽같은 시간이 줄줄 새나가게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왜 이 말씀음 드리냐면, 모르는 동네에서 생짜배기로 점방 차린 지 7개월이 다 지나갑니다만 천 원짜리 푼돈 모아 월세, 고정비 빼고 나면 제 점심값도 채 남지 않는 날이 허다한 주제에 뭔 보험, 재테크할 요량이 있겠습니까.

   개업 인사 차 방문하시겠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영업의 일환이시라면 헛다리 짚으신 겝니다. 모쪼록 선생님 귀한 시간 축내는 원흉은 되고 싶지 않다는 게 보험을 해본 사람으로서 가지는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제 마음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건승하십시오.


   세상엔 뚜벅이 보험설계사도 있고 실장님 보험설계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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